그래야 멋져지니까요:)
지난 주 회의에는 오랜만에 리인이 함께 했다. 몇 달 만의 일이었다. 리인은 내가 처음 조각보 기획단에 참여할 때 알게 된 친구고, 함께 조각보 활동을 하며 어쩌다 보니2년 반 동안 가까이서 멀리서 나를 봐왔다. 리인은
회의를 하다 말고, 내가 지금도 조각보 기획단에 자리잡아 활동하는 게
놀랍다며 웃었다.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하곤 한다. 나는 스스로 자격지심과 부끄러움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나는 어떤 말이나 일을 하고 나선 항상 후회하고 되돌리거나 지우고 싶어 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나의 모습을, 나의
말을, 나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지 항상 조마조마해하고, 그래서 나를 드러내야 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할 수 있는 한 피해왔다. 함께 활동하는 에디의 말처럼 스스로가 행복하고 빛나게 사는 것,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가는 것이 활동이라면, 나는 활동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곤 한다.
나는 여러모로 활동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트랜스젠더 활동가는 자신을 긍정하며,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고, 자신과 트랜스젠더 집단에게 가해지는 사회적인 차별, 혹은 폭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할 줄 아는 사람이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만들어낸 껍질에 갇히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서 스스로 배우고 남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처음 조각보 활동을 지원했을 때, 나는 나의 괴로움에 대한 어떤 출구가 필요했다. 그 때 나는 사회가 나에게 지정 받은 자리, 그러니까 남성이라는 자리에 대한 혐오와 괴로움이 한창 뻐렁치고 있었다. ‘사회가 지정하는 성별’이라는 일상어의 범주에서 벗어난 듯한 말은 사실 가장 생생한 일상이다. 그것은 태어날 때 의사가 신생아의 성별과 인생을 지정하는 한 순간의 일이 아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매 순간 나의 성별을 지정한다. 나는 매 순간,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사람들이 나의 성별을 지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사람들은 큰 키, 얼굴
형태, 골격, 목소리와 같은 나의 몸의 형태를 통해 나의 성별을 읽고 나를 대한다. 그것은 생각보다 폭력적이고 강력한 행위다. 단 한 번의 스쳐가는 눈길도 나를 바닥으로, 방 안으로 내몰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매 순간 나의 젠더를 지정하려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의 강력한 시도들이었다. 나는 종종, 나와
나의 정체성이 어떤 줄다리기의 줄처럼 느껴지곤 했다. 다만
한 쪽에는 아무 힘도 없는 나의 자의식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있는 불공평한 줄다리기였다. 그
사이에서 찢기지 않으려면 많은 힘이 들었고, 주위를
둘러보거나 다른 사람을 만날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다 만난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트랜스젠더 인권 지지 기반 구축 프로젝트 -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만들기 기획단>은 이름이 긴 만큼 단단해 보였고, 그곳에서 활동하다 보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마음이었다.
어림잡아 2년 반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생각보다 많기도 적기도 한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났다. 홈페이지의
조각보 소개에 있는 연혁을 봐야만 기억이 날 정도로, 연혁에는
담지 못하는 다양하고 많은 활동들을 해왔다. 그간
나도 조금은 달라졌을까.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조금씩이나마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우고, 함께
아파하고 또 기뻐해온 경험은 내가 살아가는 데 분명히 큰 힘이 되고 있다. 활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가 주는 환대와 사랑의 느낌도 내게는 소중하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나는 여전하다. 나는
여전히 일주일 중 몇 날은 사람들을 피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나의 모습이 지워지길 바라고, 소위
말하는 트랜스젠더 자긍심이라곤 눈곱 정도 밖에 없다.
조각보 활동가로 사람들을 만나고 대하다 보면,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눈빛과 태도 속에 담긴 나의 성별에 대한 추측과 곤혹스러움, 혹은 기대에 대해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사람들이 트랜스젠더 활동가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혹은 어떤 활동가를 바라는지, 또 더 나아가 어떤 활동을 바라는지 종종 궁금해지곤 했다. 나는 사람들이 스스로 상상하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모습에 부합해서 자신들의 상상을 충족시켜주면서도
그 상상과 다른 모습을 조금씩 흘려주는 당사자 활동가를 원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것 또한 나의 강박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또 여기서 더 자세히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런 모습들을 많이 봐온 것만 같다.
그런 느낌이 들 때면, 나는 사람들이 바라는, 그리고 나 또한 바라는 트랜스젠더 활동가의 모습은 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어긋남, 혹은 실패가 이전처럼 괴로움과 자책의 감정만을 불러일으키진 않는다. 오히려 그 어긋남과 실패의 지점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트랜스젠더 활동이 존재하는 곳이다.
조각보는 트랜스젠더의 복잡다단한 삶의 조각들을 이어나간다는
막연한 포부와 함께 활동해왔다. 트랜스젠더의
삶들이 복잡다단하다는 것은 하나의 매끄러운 이야기가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트랜스젠더들은 다양한 위치에서 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삶들은 언제나 사회가 바람직하고 정상적이라고 이야기하는 삶과 다른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비가시화되거나, 혹은 정상 사회가 트랜스젠더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하나의 이야기에 끼워 맞추어져왔다.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트랜스젠더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혹은
영원히 하리수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그러니까, 사람들은 한국에 트랜스젠더 운동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트랜스젠더 운동이라면 마땅히 잘 살아가는 트랜스젠더들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와 상상이
어긋나는 지점이야말로 트랜스젠더 활동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곳에서 어긋나고 실패하는 것은 트랜스젠더 각자의 삶이 아니라, 그
삶의 복잡다단함을 하나의 편한 이야기로 묶으려는 시도들이다. 애초에
묶이지 않는 것을 묶으려니 누군가는 대가를 치뤄야 하고, 사회는
그 실패의 대가를 트랜스젠더 각자에게 요구한다. 엿
같은 일이다. 그러니 나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말하는 것, 그 곳의 이야기들을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한 트랜스젠더 활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트랜스젠더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잇자는 기획, 삶의 조각보를 만들자는 기획은 하나의 아름다운 스케치에 따라 그에 맞는 이야기를 모으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에 맞지 않는 이야기와 경험과 감정을 서로
이으려는 시도다. 그렇기에 나는, 어떻게 보면 트랜스젠더 활동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망설임, 괴로움, 나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을 것 같은 고립감 같은 감정들을 잇는 일은 하나의 트랜스젠더 활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편견을 깨거나 이겨내기 위한 행동들, 혹은 그 편견을 이용해 살아가는 이야기들, 그 와중에 느끼는 긴장과 불안, 또 거기서 말해지지 않는 이야기들을 함께 말하는 것이 중요하고 힘있는 활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인가, 함께 활동하는 선율이 앞으로 만들어나갈 트랜스젠더 단체는 그저 자신 같은 사람들이 모두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조금 소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난 좀 더 거창한 것을 생각했을런지도 모른다. 트랜스젠더
단체라면 적어도, 트랜스젠더에 대한 모든 차별에 저항하는 곳이랄지,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곳이랄지, 뭐 그런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계속 선율의 말이 마음에 남고, 점점 더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나 같은 사람들이 모두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 선율 같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들은 또 어떤 사람들일까. 선율은 어떤 사람이고 난 어떤 사람일까. 또 다른 사람들은? 그
모든 사람들이 편하게 올 수 있는 곳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은
말을 조각보스럽게 풀어보자면, 그
일은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이어질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적고 나니 너무 요원해 보인다.
우선은 조금씩 트랜스젠더들의 삶의 이야기들을 잇고 엮다 보면, 언젠간 그렇게 되지 않을까. 관심을 갖고 조각보와 함께 해준 사람들을 감사히 여기고, 인터뷰로 편지로 수다로 우리와 나눠준 이야기들을 소중히 이어나가면서, 다양한 삶과 이야기, 감정들이 흘러와 머물 수 있는 곳을 만드는 일부터, 조금씩. 그것이
마냥 그럴싸한 이야기들은 아닐테지만, 조각보는
그래야 멋져지니까요:)
근데
저 그렇게 우울한 사람은 아니라능_수엉
그래야 멋져지니까요:)
지난 주 회의에는 오랜만에 리인이 함께 했다. 몇 달 만의 일이었다. 리인은 내가 처음 조각보 기획단에 참여할 때 알게 된 친구고, 함께 조각보 활동을 하며 어쩌다 보니2년 반 동안 가까이서 멀리서 나를 봐왔다. 리인은 회의를 하다 말고, 내가 지금도 조각보 기획단에 자리잡아 활동하는 게 놀랍다며 웃었다.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하곤 한다. 나는 스스로 자격지심과 부끄러움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나는 어떤 말이나 일을 하고 나선 항상 후회하고 되돌리거나 지우고 싶어 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나의 모습을, 나의 말을, 나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지 항상 조마조마해하고, 그래서 나를 드러내야 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할 수 있는 한 피해왔다. 함께 활동하는 에디의 말처럼 스스로가 행복하고 빛나게 사는 것,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가는 것이 활동이라면, 나는 활동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곤 한다.
나는 여러모로 활동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트랜스젠더 활동가는 자신을 긍정하며,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고, 자신과 트랜스젠더 집단에게 가해지는 사회적인 차별, 혹은 폭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할 줄 아는 사람이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만들어낸 껍질에 갇히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서 스스로 배우고 남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처음 조각보 활동을 지원했을 때, 나는 나의 괴로움에 대한 어떤 출구가 필요했다. 그 때 나는 사회가 나에게 지정 받은 자리, 그러니까 남성이라는 자리에 대한 혐오와 괴로움이 한창 뻐렁치고 있었다. ‘사회가 지정하는 성별’이라는 일상어의 범주에서 벗어난 듯한 말은 사실 가장 생생한 일상이다. 그것은 태어날 때 의사가 신생아의 성별과 인생을 지정하는 한 순간의 일이 아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매 순간 나의 성별을 지정한다. 나는 매 순간,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사람들이 나의 성별을 지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사람들은 큰 키, 얼굴 형태, 골격, 목소리와 같은 나의 몸의 형태를 통해 나의 성별을 읽고 나를 대한다. 그것은 생각보다 폭력적이고 강력한 행위다. 단 한 번의 스쳐가는 눈길도 나를 바닥으로, 방 안으로 내몰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매 순간 나의 젠더를 지정하려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의 강력한 시도들이었다. 나는 종종, 나와 나의 정체성이 어떤 줄다리기의 줄처럼 느껴지곤 했다. 다만 한 쪽에는 아무 힘도 없는 나의 자의식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있는 불공평한 줄다리기였다. 그 사이에서 찢기지 않으려면 많은 힘이 들었고, 주위를 둘러보거나 다른 사람을 만날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다 만난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트랜스젠더 인권 지지 기반 구축 프로젝트 -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만들기 기획단>은 이름이 긴 만큼 단단해 보였고, 그곳에서 활동하다 보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마음이었다.
어림잡아 2년 반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생각보다 많기도 적기도 한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났다. 홈페이지의 조각보 소개에 있는 연혁을 봐야만 기억이 날 정도로, 연혁에는 담지 못하는 다양하고 많은 활동들을 해왔다. 그간 나도 조금은 달라졌을까.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조금씩이나마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우고, 함께 아파하고 또 기뻐해온 경험은 내가 살아가는 데 분명히 큰 힘이 되고 있다. 활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가 주는 환대와 사랑의 느낌도 내게는 소중하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나는 여전하다. 나는 여전히 일주일 중 몇 날은 사람들을 피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나의 모습이 지워지길 바라고, 소위 말하는 트랜스젠더 자긍심이라곤 눈곱 정도 밖에 없다.
조각보 활동가로 사람들을 만나고 대하다 보면,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눈빛과 태도 속에 담긴 나의 성별에 대한 추측과 곤혹스러움, 혹은 기대에 대해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사람들이 트랜스젠더 활동가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혹은 어떤 활동가를 바라는지, 또 더 나아가 어떤 활동을 바라는지 종종 궁금해지곤 했다. 나는 사람들이 스스로 상상하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모습에 부합해서 자신들의 상상을 충족시켜주면서도 그 상상과 다른 모습을 조금씩 흘려주는 당사자 활동가를 원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것 또한 나의 강박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또 여기서 더 자세히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런 모습들을 많이 봐온 것만 같다.
그런 느낌이 들 때면, 나는 사람들이 바라는, 그리고 나 또한 바라는 트랜스젠더 활동가의 모습은 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어긋남, 혹은 실패가 이전처럼 괴로움과 자책의 감정만을 불러일으키진 않는다. 오히려 그 어긋남과 실패의 지점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트랜스젠더 활동이 존재하는 곳이다.
조각보는 트랜스젠더의 복잡다단한 삶의 조각들을 이어나간다는 막연한 포부와 함께 활동해왔다. 트랜스젠더의 삶들이 복잡다단하다는 것은 하나의 매끄러운 이야기가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트랜스젠더들은 다양한 위치에서 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삶들은 언제나 사회가 바람직하고 정상적이라고 이야기하는 삶과 다른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비가시화되거나, 혹은 정상 사회가 트랜스젠더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하나의 이야기에 끼워 맞추어져왔다.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트랜스젠더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혹은 영원히 하리수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그러니까, 사람들은 한국에 트랜스젠더 운동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트랜스젠더 운동이라면 마땅히 잘 살아가는 트랜스젠더들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와 상상이 어긋나는 지점이야말로 트랜스젠더 활동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곳에서 어긋나고 실패하는 것은 트랜스젠더 각자의 삶이 아니라, 그 삶의 복잡다단함을 하나의 편한 이야기로 묶으려는 시도들이다. 애초에 묶이지 않는 것을 묶으려니 누군가는 대가를 치뤄야 하고, 사회는 그 실패의 대가를 트랜스젠더 각자에게 요구한다. 엿 같은 일이다. 그러니 나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말하는 것, 그 곳의 이야기들을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한 트랜스젠더 활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트랜스젠더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잇자는 기획, 삶의 조각보를 만들자는 기획은 하나의 아름다운 스케치에 따라 그에 맞는 이야기를 모으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에 맞지 않는 이야기와 경험과 감정을 서로 이으려는 시도다. 그렇기에 나는, 어떻게 보면 트랜스젠더 활동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망설임, 괴로움, 나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을 것 같은 고립감 같은 감정들을 잇는 일은 하나의 트랜스젠더 활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편견을 깨거나 이겨내기 위한 행동들, 혹은 그 편견을 이용해 살아가는 이야기들, 그 와중에 느끼는 긴장과 불안, 또 거기서 말해지지 않는 이야기들을 함께 말하는 것이 중요하고 힘있는 활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인가, 함께 활동하는 선율이 앞으로 만들어나갈 트랜스젠더 단체는 그저 자신 같은 사람들이 모두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조금 소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난 좀 더 거창한 것을 생각했을런지도 모른다. 트랜스젠더 단체라면 적어도, 트랜스젠더에 대한 모든 차별에 저항하는 곳이랄지,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곳이랄지, 뭐 그런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계속 선율의 말이 마음에 남고, 점점 더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나 같은 사람들이 모두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 선율 같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들은 또 어떤 사람들일까. 선율은 어떤 사람이고 난 어떤 사람일까. 또 다른 사람들은? 그 모든 사람들이 편하게 올 수 있는 곳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은 말을 조각보스럽게 풀어보자면, 그 일은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이어질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적고 나니 너무 요원해 보인다.
우선은 조금씩 트랜스젠더들의 삶의 이야기들을 잇고 엮다 보면, 언젠간 그렇게 되지 않을까. 관심을 갖고 조각보와 함께 해준 사람들을 감사히 여기고, 인터뷰로 편지로 수다로 우리와 나눠준 이야기들을 소중히 이어나가면서, 다양한 삶과 이야기, 감정들이 흘러와 머물 수 있는 곳을 만드는 일부터, 조금씩. 그것이 마냥 그럴싸한 이야기들은 아닐테지만, 조각보는 그래야 멋져지니까요:)
근데 저 그렇게 우울한 사람은 아니라능_수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