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에이드 같은 인권 활동가
2013 하얀 눈이 녹아 내리기 시작한 그때즈으으음, 활동가의 뜻도 모르고 ‘트랜스젠더
인권을 위해 활동할 조각보 활동가 모집’이란 말에 몸 속 깊은 곳에서의 뜨거워짐을 가지고 무작정 찾아가 홍대 입구 근처의 KSCRC문을 두드린 지 어느덧 3년... 원래 성격이 밝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쾌락성애자라서 그런지 3년 내내 조각보 활동하면서 새로운 수식어를 얻을 수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건 ‘군대 나온 여자, 내
인생 첫 티지, 호르몬 셀럽...’ 등이 있지. 그래도 가장 애정 하는 수식어는 ‘박에디’가 아닐까 해.
성소수자에서도 희귀하다는 트랜스젠더, MtF도 신기한데 FtM이 나오기라도 하면 새로운 캐릭터가 업데이트 된 것 마냥 초롱초롱한 눈을
감추지 못하고 관심을 보인 탓에 시스젠더 이성애자들뿐만이 아니라 같은 성소수자 안의 라인에서도 관심의 중심이 되었던 같아. 덕분에 조각보 활동은 언제나 인권 활동판에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했지...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트랜스젠더
인권 단체를 만들기 위해 소리 내어 외쳤던 건 ‘우린 이런 걸 원한다’보다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이지 않았을까? 의료적인 부분부터 성별 정정
등 사회구성원으로써 ‘부가설명’ 없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보호 및 지원 정책 등이 필요한데 ‘다름’을 ‘틀림’이라 믿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드러내고
활동하는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던 것 같아. 트랜스젠더에
대한 부당한 사회의 대우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연구자들 및 활동가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 ‘당사자
만나기’라고 이야기 하는 걸 보면 말 다 한 거지.
여튼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우린 퀴어문화축제, 아이다호 등의 대외적인 행사 참가로 우리의 존재를 알려왔고, 어렵게 어렵게 모인 당사자들과 희,노,애.락을 나누기 위한 자리들을
마련했어. 그것뿐이겠나? 그렇게
바쁜 와중에서 ‘나’란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 큰 행사(퀴어문화축제 등)에서
가장 빛나는 공연자로, 발언자로, 또
불러주면 어디든지 가는 그런 인권활동계의 ‘나가요 걸’로서
열심히 활동했던 것 같아, 거기에 욕심을 더해 트랜스젠더 당사자를 넘어 ‘박에디’로 불릴 수 있도록 말이지
그렇게 3년이 흘러갔고 대외적인 활동으로 인해 내가 얻은 건 트랜스젠더 당사자로써의 희소성(?)이 기반이 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긍심이야. 이젠 어디에서든 내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기대한 만큼의 반응이 없으면 실망하고 상처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어!
열심히
앞만 보고 활동한 결과인지 제법 건전(?)하고 밝은 트랜스젠더 당사자 활동가로 알려질 무렵, 같은 교회에서 알고 지낸 청소년 성소수자 동생의 죽음으로 나의 인권 이슈는 청소년 성소수자
영역으로 옮겨지게 되었어. 풀리지 않은 고민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나의 어린 시절에 한 명이라도 존재 자체의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정말 그 생각 하나와 열정 그리고 몸뚱이를 가지고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상임활동가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지금은 ‘어릴 적 내가 원하던 든든한 백’이
되기 위해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어.
요즘
청소년 성소수자 친구들은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사회적인 시각으로 성인의 기준이 되는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는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현실적인 부분 예를 들면 의료, 소득, 직업 등의 문제로 힘들어
한다면 학교나 가정, 친구들이 전부라 생각하는 청소년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의 힘듦은 롤모델의 부재, 부모에게 불효를 범한다는 죄의식, 그리기
어려운 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청소년 시기는 꿈을 꾸고 그 꿈을 그려 나가기 위한 준비물을 알아보는 시기라고 생각하거든. 뭔가를
이룩하지 않아도, 상상하는 꿈에 대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시기를
잘 보냈다고 생각하니까.
누군들
이런 하드코어한 삶을 선택할까? 억울한 일이지. 그렇지만
시계는 작동하니까, 차라리 그 시간을 즐기기 위해 쓰는 게 훨씬 덜 억울하지 않을까? 누군가 말하기를 ‘인생이
당신에게 신 레몬을 줬다면 불평할 시간에 레몬에이드를 만들어 목말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팔라’고
하더라고. 어차피 이렇게 태어난 거 웃다가 가야지, 그리고 잘 살아야지, 기왕이면
나에게 맞는 나만의 방식을 가지고 말이지.
상담을
하는 친구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성별도 중요하지만 어떤 모습보다는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거 같아.
“참고 견뎌! 하지만
가만히 있지는 마! 지금 갇혀있는 틀이 깨지는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갈 수 있게 준비하길!!!”
트랜스젠더
인권 활동가로 또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활동가로 나는 지금도 진행 중이야. 사실 내가 계획했던 20대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열정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어. 어떤 면에서는 인권활동가랑은 가깝기도 하지만 내가 그렸던 모습하고는 사실 거리가 좀 멀긴
하지. 하지만! 그래도
난 지금 너무 즐거워. 나에 대해 궁금해하고 알아봐주고 찾아주는 사람들이 옆에 있기에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조금 더 욕심을 내서 더 활동해볼까 생각 중이야. 나만의 방식으로!
지금
이 글을 읽는 네가 ‘박에디’를
직접 만날 수 있을 때까지,
맛있는 !! 거기에 보기에도 아주 이쁜!
레몬에이드
같은 모습으로 난 계속 활동할거야!
싹수가 빨간 박에디
레몬에이드 같은 인권 활동가
2013 하얀 눈이 녹아 내리기 시작한 그때즈으으음, 활동가의 뜻도 모르고 ‘트랜스젠더 인권을 위해 활동할 조각보 활동가 모집’이란 말에 몸 속 깊은 곳에서의 뜨거워짐을 가지고 무작정 찾아가 홍대 입구 근처의 KSCRC문을 두드린 지 어느덧 3년... 원래 성격이 밝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쾌락성애자라서 그런지 3년 내내 조각보 활동하면서 새로운 수식어를 얻을 수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건 ‘군대 나온 여자, 내 인생 첫 티지, 호르몬 셀럽...’ 등이 있지. 그래도 가장 애정 하는 수식어는 ‘박에디’가 아닐까 해.
성소수자에서도 희귀하다는 트랜스젠더, MtF도 신기한데 FtM이 나오기라도 하면 새로운 캐릭터가 업데이트 된 것 마냥 초롱초롱한 눈을 감추지 못하고 관심을 보인 탓에 시스젠더 이성애자들뿐만이 아니라 같은 성소수자 안의 라인에서도 관심의 중심이 되었던 같아. 덕분에 조각보 활동은 언제나 인권 활동판에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했지...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트랜스젠더 인권 단체를 만들기 위해 소리 내어 외쳤던 건 ‘우린 이런 걸 원한다’보다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이지 않았을까? 의료적인 부분부터 성별 정정 등 사회구성원으로써 ‘부가설명’ 없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보호 및 지원 정책 등이 필요한데 ‘다름’을 ‘틀림’이라 믿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드러내고 활동하는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던 것 같아. 트랜스젠더에 대한 부당한 사회의 대우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연구자들 및 활동가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 ‘당사자 만나기’라고 이야기 하는 걸 보면 말 다 한 거지.
여튼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우린 퀴어문화축제, 아이다호 등의 대외적인 행사 참가로 우리의 존재를 알려왔고, 어렵게 어렵게 모인 당사자들과 희,노,애.락을 나누기 위한 자리들을 마련했어. 그것뿐이겠나? 그렇게 바쁜 와중에서 ‘나’란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 큰 행사(퀴어문화축제 등)에서 가장 빛나는 공연자로, 발언자로, 또 불러주면 어디든지 가는 그런 인권활동계의 ‘나가요 걸’로서 열심히 활동했던 것 같아, 거기에 욕심을 더해 트랜스젠더 당사자를 넘어 ‘박에디’로 불릴 수 있도록 말이지
그렇게 3년이 흘러갔고 대외적인 활동으로 인해 내가 얻은 건 트랜스젠더 당사자로써의 희소성(?)이 기반이 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긍심이야. 이젠 어디에서든 내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기대한 만큼의 반응이 없으면 실망하고 상처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어!
열심히 앞만 보고 활동한 결과인지 제법 건전(?)하고 밝은 트랜스젠더 당사자 활동가로 알려질 무렵, 같은 교회에서 알고 지낸 청소년 성소수자 동생의 죽음으로 나의 인권 이슈는 청소년 성소수자 영역으로 옮겨지게 되었어. 풀리지 않은 고민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나의 어린 시절에 한 명이라도 존재 자체의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정말 그 생각 하나와 열정 그리고 몸뚱이를 가지고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상임활동가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지금은 ‘어릴 적 내가 원하던 든든한 백’이 되기 위해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어.
요즘 청소년 성소수자 친구들은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사회적인 시각으로 성인의 기준이 되는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는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현실적인 부분 예를 들면 의료, 소득, 직업 등의 문제로 힘들어 한다면 학교나 가정, 친구들이 전부라 생각하는 청소년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의 힘듦은 롤모델의 부재, 부모에게 불효를 범한다는 죄의식, 그리기 어려운 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청소년 시기는 꿈을 꾸고 그 꿈을 그려 나가기 위한 준비물을 알아보는 시기라고 생각하거든. 뭔가를 이룩하지 않아도, 상상하는 꿈에 대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시기를 잘 보냈다고 생각하니까.
누군들 이런 하드코어한 삶을 선택할까? 억울한 일이지. 그렇지만 시계는 작동하니까, 차라리 그 시간을 즐기기 위해 쓰는 게 훨씬 덜 억울하지 않을까? 누군가 말하기를 ‘인생이 당신에게 신 레몬을 줬다면 불평할 시간에 레몬에이드를 만들어 목말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팔라’고 하더라고. 어차피 이렇게 태어난 거 웃다가 가야지, 그리고 잘 살아야지, 기왕이면 나에게 맞는 나만의 방식을 가지고 말이지.
상담을 하는 친구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성별도 중요하지만 어떤 모습보다는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거 같아.
“참고 견뎌! 하지만 가만히 있지는 마! 지금 갇혀있는 틀이 깨지는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갈 수 있게 준비하길!!!”
트랜스젠더 인권 활동가로 또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활동가로 나는 지금도 진행 중이야. 사실 내가 계획했던 20대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열정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어. 어떤 면에서는 인권활동가랑은 가깝기도 하지만 내가 그렸던 모습하고는 사실 거리가 좀 멀긴 하지. 하지만! 그래도 난 지금 너무 즐거워. 나에 대해 궁금해하고 알아봐주고 찾아주는 사람들이 옆에 있기에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조금 더 욕심을 내서 더 활동해볼까 생각 중이야. 나만의 방식으로!
지금 이 글을 읽는 네가 ‘박에디’를 직접 만날 수 있을 때까지,
맛있는 !! 거기에 보기에도 아주 이쁜!
레몬에이드 같은 모습으로 난 계속 활동할거야!
싹수가 빨간 박에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