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와 조각보 그리고 홀릭
2013년 센터는 새로운 운동의 방향을 고민할 때, 트랜스젠더 인권운동 단체가 필요함을 느끼고 “트랜스젠더 인권지지기반 구축 프로젝트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만들기” 라는 긴 이름의 프로포절을 아름다운 재단에 냈었다. 그리고, 올해가 3년 프로젝트의 갈무리 단계이며 곧 트랜스젠더 인권단체가
만들어질 예정이다.
잠깐 센터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센터가 잘하는 것은 어떤 운동의 필요성을 느껴 그것을
구체화한 후 결국 하나의 단체로 자생시키는 일인 거 같다. 쉽게 생각하면 인큐베이팅이라 말할 수 있다.
2005년 여성이반미디어활동가 양성을 위한 미디어 교육 “주파수 L을 잡아라” 를 통해 지금의 <레즈비언주파수 라디오 - 레주파>가 생겼고, 2007년 <10대 여성을 위한 레인보우 브릿지 (Rainbow Bridge) 첫삽뜨기 '물보라작전(Spray
Project)' - 10대 여성 거리상담 프로젝트를 통해 지금의 <성적소수자를 위한 – 별의별 상담소>가 생겼으며 2009년 <한국 퀴어아카이브 구축> 프로젝트를 통해 지금의 <퀴어들의 자료를 모아놓는 – 한국 퀴어 아카이브 퀴어락> 이 생겼다.
그리고 2013년 트랜스젠더 인권지지기반 구축 프로젝트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만들기를 통해서 2015년 11월 트랜스젠더 인권단체로 발돋움하는 <조각보>의 발족을 앞두고 있다.
다른 역사들보다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가 만들어진다는 것에 대해 많은 감정들이 교차하여 가슴이
벅차 오르기도 하고 뿌듯하면서도 아쉽기도 하고 허전함의 감정까지 드는 요즘이다. 프로젝트 첫 해에는 리인님께서, 둘째 해에는 캔디님, 그리고 마지막 올해에는 내가 조각보에
기획단원으로 참여하였다. 매해마다 센터 활동가들의 고민들이 있었는데 첫해에 리인님의 고민은 트랜스젠더 운동에 대해서 “잘 모른다” 는 감정으로 많이 울었던 그 모습을 기억한다. 둘째 해의 캔디님 고민은 “내가 조각보 활동에서 사람들의 역량을
저하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 대한 고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 셋째 해의 나의 고민은 앞선 리인님의 고민에 덧붙여서, 그리고 캔디님의 고민과는 반대의 고민인 나의 역량에
대한 고민이었다.
트랜스젠더 인권에 대해서 잘 모를뿐더러 프로젝트로 시작한 조각보를 인권단체의 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부담과 단체의 상을 잘 찾아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까지 작용하였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가장 크게 내게 자리했던 “잘 모른다”는 고민의 지점들이 일반(편하게 쓰는 호칭으로 이해를 부탁) 사람들이 성적소수자에 대해 “저는 성적소수자를 잘 몰라요..”라고 할 때 화나는 고민지점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잘 모른다는 핑계는 이제 하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기획단 안에서도 많은 차이와 잘 모름에 대한 고민들이 다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각보 기획단의 어떤 이는 이 바닥에는
이성애자들만 있는 줄 알았다는 말 속에서, 기획단 회의를 하면서도 회의하는 내용과 말들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부터 당사자가 아닌데 트랜스젠더
운동을 하는 이해할 수 없음의 이유까지.. 그 차이를 서로 알고 서로 인정하는데 3년의 시간은 부족하면서도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단체”를 만들어야 할지 어두운 터널을 지나갈
때, “단체”의 무게가 모두를 힘겹게 할 때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조각보가 가장 잘 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제일 재미있었을까?” 로 돌아와서 모두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조각보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주류적인 것,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운동, 어려운 것, 이런 것을 버릴 수 있는 힘.. 그리고, 복잡다단한 트랜스젠더의 삶을 보여주고자 하는 그 활동들,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아직도 난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트랜스젠더 운동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렇다고 나의 정체성인 레즈비언에 대해서
레즈비언 운동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아니다. 다만 처음의 모른다와 지금의 모른다의 차이는 처음에는 막연한 두려움이라면 지금은 운동 안에서 수많은 차이를 존중해야
함을 알게 되었고 그런 면에서 많이 공부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모름이다.
처음 인권운동을 시작할 때 나의 모습은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본가에서 엄마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긴 머리의 모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를 짧게 잘랐을 때 내가 내가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비록 이 바닥에서 레즈비언으로 인정받는
시간보다 부치 정체성을 획득하는데 시간이 더 걸렸지만(부치가 뭐라고 ㅎㅎ),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나에는 트랜지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삶은 복잡다단하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삶에도 말이다. 물론 새발의 피 만큼의 경험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도 조각보자기의 한 켠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도!
나를 아주 많이 성장시켜 주고
부족한 나를 받아준
따뜻한 조각보. 의 기획단원 홀릭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와 조각보 그리고 홀릭
2013년 센터는 새로운 운동의 방향을 고민할 때, 트랜스젠더 인권운동 단체가 필요함을 느끼고 “트랜스젠더 인권지지기반 구축 프로젝트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만들기” 라는 긴 이름의 프로포절을 아름다운 재단에 냈었다. 그리고, 올해가 3년 프로젝트의 갈무리 단계이며 곧 트랜스젠더 인권단체가 만들어질 예정이다.
잠깐 센터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센터가 잘하는 것은 어떤 운동의 필요성을 느껴 그것을 구체화한 후 결국 하나의 단체로 자생시키는 일인 거 같다. 쉽게 생각하면 인큐베이팅이라 말할 수 있다.
2005년 여성이반미디어활동가 양성을 위한 미디어 교육 “주파수 L을 잡아라” 를 통해 지금의 <레즈비언주파수 라디오 - 레주파>가 생겼고, 2007년 <10대 여성을 위한 레인보우 브릿지 (Rainbow Bridge) 첫삽뜨기 '물보라작전(Spray Project)' - 10대 여성 거리상담 프로젝트를 통해 지금의 <성적소수자를 위한 – 별의별 상담소>가 생겼으며 2009년 <한국 퀴어아카이브 구축> 프로젝트를 통해 지금의 <퀴어들의 자료를 모아놓는 – 한국 퀴어 아카이브 퀴어락> 이 생겼다.
그리고 2013년 트랜스젠더 인권지지기반 구축 프로젝트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만들기를 통해서 2015년 11월 트랜스젠더 인권단체로 발돋움하는 <조각보>의 발족을 앞두고 있다.
다른 역사들보다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가 만들어진다는 것에 대해 많은 감정들이 교차하여 가슴이 벅차 오르기도 하고 뿌듯하면서도 아쉽기도 하고 허전함의 감정까지 드는 요즘이다. 프로젝트 첫 해에는 리인님께서, 둘째 해에는 캔디님, 그리고 마지막 올해에는 내가 조각보에 기획단원으로 참여하였다. 매해마다 센터 활동가들의 고민들이 있었는데 첫해에 리인님의 고민은 트랜스젠더 운동에 대해서 “잘 모른다” 는 감정으로 많이 울었던 그 모습을 기억한다. 둘째 해의 캔디님 고민은 “내가 조각보 활동에서 사람들의 역량을 저하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 대한 고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 셋째 해의 나의 고민은 앞선 리인님의 고민에 덧붙여서, 그리고 캔디님의 고민과는 반대의 고민인 나의 역량에 대한 고민이었다.
트랜스젠더 인권에 대해서 잘 모를뿐더러 프로젝트로 시작한 조각보를 인권단체의 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부담과 단체의 상을 잘 찾아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까지 작용하였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가장 크게 내게 자리했던 “잘 모른다”는 고민의 지점들이 일반(편하게 쓰는 호칭으로 이해를 부탁) 사람들이 성적소수자에 대해 “저는 성적소수자를 잘 몰라요..”라고 할 때 화나는 고민지점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잘 모른다는 핑계는 이제 하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기획단 안에서도 많은 차이와 잘 모름에 대한 고민들이 다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각보 기획단의 어떤 이는 이 바닥에는 이성애자들만 있는 줄 알았다는 말 속에서, 기획단 회의를 하면서도 회의하는 내용과 말들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부터 당사자가 아닌데 트랜스젠더 운동을 하는 이해할 수 없음의 이유까지.. 그 차이를 서로 알고 서로 인정하는데 3년의 시간은 부족하면서도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단체”를 만들어야 할지 어두운 터널을 지나갈 때, “단체”의 무게가 모두를 힘겹게 할 때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조각보가 가장 잘 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제일 재미있었을까?” 로 돌아와서 모두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조각보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주류적인 것,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운동, 어려운 것, 이런 것을 버릴 수 있는 힘.. 그리고, 복잡다단한 트랜스젠더의 삶을 보여주고자 하는 그 활동들,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아직도 난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트랜스젠더 운동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렇다고 나의 정체성인 레즈비언에 대해서 레즈비언 운동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아니다. 다만 처음의 모른다와 지금의 모른다의 차이는 처음에는 막연한 두려움이라면 지금은 운동 안에서 수많은 차이를 존중해야 함을 알게 되었고 그런 면에서 많이 공부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모름이다.
처음 인권운동을 시작할 때 나의 모습은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본가에서 엄마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긴 머리의 모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를 짧게 잘랐을 때 내가 내가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비록 이 바닥에서 레즈비언으로 인정받는 시간보다 부치 정체성을 획득하는데 시간이 더 걸렸지만(부치가 뭐라고 ㅎㅎ),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나에는 트랜지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삶은 복잡다단하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삶에도 말이다. 물론 새발의 피 만큼의 경험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도 조각보자기의 한 켠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도!
나를 아주 많이 성장시켜 주고
부족한 나를 받아준
따뜻한 조각보. 의 기획단원 홀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