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트랜스 운동이 뭐길래
-새로 단체를 설립하며 도대체 뭘 해야 할 지 고민하는 조각보 활동가들에게
Transgender
rights are human rights라는 해외의
유명한 문구가 있다. 트랜스의 인권은 인간의 권리이다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외국의 이 문장은 트랜스도 다른 비트랜스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어떤 모습이든, 그들의 삶과 관련해서 어떤 선택을 하고 살아가든 존중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저 문장은 항상 나에게 “그러니까
모든 인권 의제는 트랜스 의제”라는 말로 다가온다. 가끔, 트랜스의 인권과 관련된 기사가 언론에 나올 때마다, 그 주제들은 상당히 한정이 되곤 한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성별정정, 수술 그리고 군대. 그리고
그 세 가지만 해결된다면 한국의 트랜스들은 천국과 같은 곳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이 살아갈 것처럼 느껴지도록 표현하기도 한다. 아프도록 당연하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사실은 언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꼭
언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거나, 적어도
짐작은 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것은 그렇게 법과 제도만 있으면 규격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트랜스 의제라는 게 있긴 한 걸까?
분명히
의제는 있다. 다만, 우리가
캐치하지 못할 뿐이다. 인권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헌법 10조 와 11조 1항을 인용한다. 노동과 관련해서는 32조의 모든 국민의 근로의 권리에 관한 조항을 인용할 수 있고, 인간다운 생활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34조를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항목 하나하나를 열거할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헌법이 규정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많은 트랜스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으며, 각각의 조항에서는 더 많은 권리에서 배제되어 있기도 하다.
한
명의 개인이 태어나서 자라고 성인이 되고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아주 기본적으로도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누군가 자신을 양육해주어야 하기도 하고, 학교에
가는 것을 보장받아야 할 것만이 아니라, 학교 안팎에서의 삶을 함께 누릴 환경도 보장이 되어야 한다. 성인이 되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삶의 영위를 위한 추가 교육의 기회 보장, 차별 없는 직장으로의 진입, 주거
보장 등 수많은 것들이 보장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라고 하는 삶의 동반자를 얻게
되며, 그것이 어려운 경우에는 ‘국가’라는 보장체계와 손을 잡기도 한다. 그런데, 트랜스라는 단어가 그 앞에 붙는 순간, 이
모든 보호와 보장은 불확실하고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 되어버리곤 한다. 트랜스
아동이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하는 순간, 자신의 모습대로 학교에 가겠다고 주장하는 순간, 학교에 입학하고 학교에 다니는 과정에서, 직장을
잡는 과정에서, 집을 얻는 순간 등 인생의 중요한 과정에서 그리고 슈퍼에 가고, 은행에, 병원에, 목욕탕에 가는 등의 삶의 시시콜콜한 순간에서 트랜스는 차별, 혐오에, 불안과 불편을 마주하게 된다.
trans
rights are human rights는 그런
것이다. 어떤 이들이 무심코 지나가는 모든 일들이 트랜스들에게도 무심코 지나가도 되는
일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삶의 과정이 트랜스 운동의 의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운동을 해야 하는가
이
글을 쓰는 도중, 아르헨티나의 한 트랜스 활동가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페이스북에 추모의 글을 쓰며 도대체 어떤 운동이 더 필요한가 고민했다. 그녀가 살해당한 아르헨티나는 호르몬 요법을 진행하지 않아도, 성별적합수술을 진행하지 않아도 성별변경이 가능한 곳이다. 그리고 수술을 원한다면 국가에서 수술을 지원해주기도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그
나라의 그런 상황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꿈같은 일이고 평생을 원하고 또 원하는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제도들이 있는 남미의 여러 나라에서 트랜스 살해는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매년 5월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에 TGEU라는 단체는 누적되고 있는 트랜스 살해 모니터링 결과를 발표한다. 2008년 첫 조사 이후 1,731 케이스의 살인이 보고되었으며, 그 중의 51%는 브라질이었다. 그리고 지난 7년 동안 한국에서는 2010년, 단 한 건의 케이스가 보고되었을 뿐이다 (http://www.transrespect-transphob119ia.org/en_US/tvt-project/tmm-results/idahot-2015.htm)
이
결과만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가늠할 수는 없다. 각 나라마다의 사회적 상황이 다를 것이고, 운동이 다를 것이고, 또
인터넷 접속이나 미디어 상황에 따라서도 보고되는 케이스는 다를 수밖에 없다. 단
한가지 확실한 것은, 트랜스들이 지속적으로 살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살해는 걸어가다가 하늘에서 벼락이 친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성별정체성과 관련하여 누군가 계획적으로 혹은 충동적으로 저지른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것이 외국의 이야기일 리는 없다. 우리나라라고
트랜스 살해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살률은 뭐, 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나라는 그 사건들이 가시화조차 되지 못하는 환경들인 것뿐이다.
그래서
계속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 스스로와 싸워야 하고, 사회와
싸워야 하고, (어떤 이들은) 평생
살해의 두려움이 살아야 하는 상황. 가시화와 법 제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많은 것들. 어떤 것이 우선순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우선순위일 수밖에 없는 상황들. 하지만,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할 수는 없는 상황들. 이 상황에서 도대체 뭘 해야 하는 걸까.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음에 고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가 싶다가도, 고민마저
사치이고, 우리는 트랜스 ‘운동’을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오묘한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도, 그리고
다행히도, 그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정답이 절대 아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일단, 이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해의 공포에서, 차별의
고리에서, 경제적 압박에서, 그리고
사회의 시선에서 일단은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
살고
보자. 쥐 죽은 듯이 살아도 좋고, 온
세상에 커밍아웃을 하며 살아도 좋다. 매일매일 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해도 좋지만, 그냥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좋아요”만 눌러도 좋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생명보전만 하면서라도 살아가자, 여하튼 살아가보자.
활동가는
꼭 글을 잘 써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활동가는 꼭 말을 조근조근 잘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활동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활동가는
모두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활동가는, 트랜스 활동가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계속 살아갈 것임을 세상에 속삭이는 사람이다. 조각보 안에서 함께 트랜스 당사자인 내가 있음을, 그리고 지지자인 내가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
받고, 내가 약한 부분을 드러내고, 위안
받고, 그리고 또 살아내면 된다.
어떤
한 개의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해내고, 단체의 위치를 만들어나가고, 단체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것도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살아있음으로 더 안전하고 건강한 내
삶을, 우리의 삶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살아내야 한다. 살아내서 내일의 삶을 만나기
위해, 내 삶으로 다른 사람의 삶도 구하기 위해 살아내야 한다.
그렇게
살아 내다보면, 어느 순간 우리의 운동은 더 반짝이고 있을 것이고, 세상이 변화했음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여기까지 왔음을 불현듯 느끼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도 내일도 행복한 캔디.D
도대체 트랜스 운동이 뭐길래
-새로 단체를 설립하며 도대체 뭘 해야 할 지 고민하는 조각보 활동가들에게
Transgender rights are human rights라는 해외의 유명한 문구가 있다. 트랜스의 인권은 인간의 권리이다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외국의 이 문장은 트랜스도 다른 비트랜스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어떤 모습이든, 그들의 삶과 관련해서 어떤 선택을 하고 살아가든 존중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저 문장은 항상 나에게 “그러니까 모든 인권 의제는 트랜스 의제”라는 말로 다가온다. 가끔, 트랜스의 인권과 관련된 기사가 언론에 나올 때마다, 그 주제들은 상당히 한정이 되곤 한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성별정정, 수술 그리고 군대. 그리고 그 세 가지만 해결된다면 한국의 트랜스들은 천국과 같은 곳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이 살아갈 것처럼 느껴지도록 표현하기도 한다. 아프도록 당연하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사실은 언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꼭 언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거나, 적어도 짐작은 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것은 그렇게 법과 제도만 있으면 규격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트랜스 의제라는 게 있긴 한 걸까?
분명히 의제는 있다. 다만, 우리가 캐치하지 못할 뿐이다. 인권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헌법 10조 와 11조 1항을 인용한다. 노동과 관련해서는 32조의 모든 국민의 근로의 권리에 관한 조항을 인용할 수 있고, 인간다운 생활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34조를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항목 하나하나를 열거할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헌법이 규정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많은 트랜스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으며, 각각의 조항에서는 더 많은 권리에서 배제되어 있기도 하다.
한 명의 개인이 태어나서 자라고 성인이 되고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아주 기본적으로도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누군가 자신을 양육해주어야 하기도 하고, 학교에 가는 것을 보장받아야 할 것만이 아니라, 학교 안팎에서의 삶을 함께 누릴 환경도 보장이 되어야 한다. 성인이 되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삶의 영위를 위한 추가 교육의 기회 보장, 차별 없는 직장으로의 진입, 주거 보장 등 수많은 것들이 보장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라고 하는 삶의 동반자를 얻게 되며, 그것이 어려운 경우에는 ‘국가’라는 보장체계와 손을 잡기도 한다. 그런데, 트랜스라는 단어가 그 앞에 붙는 순간, 이 모든 보호와 보장은 불확실하고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 되어버리곤 한다. 트랜스 아동이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하는 순간, 자신의 모습대로 학교에 가겠다고 주장하는 순간, 학교에 입학하고 학교에 다니는 과정에서, 직장을 잡는 과정에서, 집을 얻는 순간 등 인생의 중요한 과정에서 그리고 슈퍼에 가고, 은행에, 병원에, 목욕탕에 가는 등의 삶의 시시콜콜한 순간에서 트랜스는 차별, 혐오에, 불안과 불편을 마주하게 된다.
trans rights are human rights는 그런 것이다. 어떤 이들이 무심코 지나가는 모든 일들이 트랜스들에게도 무심코 지나가도 되는 일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삶의 과정이 트랜스 운동의 의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운동을 해야 하는가
이 글을 쓰는 도중, 아르헨티나의 한 트랜스 활동가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페이스북에 추모의 글을 쓰며 도대체 어떤 운동이 더 필요한가 고민했다. 그녀가 살해당한 아르헨티나는 호르몬 요법을 진행하지 않아도, 성별적합수술을 진행하지 않아도 성별변경이 가능한 곳이다. 그리고 수술을 원한다면 국가에서 수술을 지원해주기도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그 나라의 그런 상황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꿈같은 일이고 평생을 원하고 또 원하는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제도들이 있는 남미의 여러 나라에서 트랜스 살해는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매년 5월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에 TGEU라는 단체는 누적되고 있는 트랜스 살해 모니터링 결과를 발표한다. 2008년 첫 조사 이후 1,731 케이스의 살인이 보고되었으며, 그 중의 51%는 브라질이었다. 그리고 지난 7년 동안 한국에서는 2010년, 단 한 건의 케이스가 보고되었을 뿐이다 (http://www.transrespect-transphob119ia.org/en_US/tvt-project/tmm-results/idahot-2015.htm)
이 결과만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가늠할 수는 없다. 각 나라마다의 사회적 상황이 다를 것이고, 운동이 다를 것이고, 또 인터넷 접속이나 미디어 상황에 따라서도 보고되는 케이스는 다를 수밖에 없다. 단 한가지 확실한 것은, 트랜스들이 지속적으로 살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살해는 걸어가다가 하늘에서 벼락이 친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성별정체성과 관련하여 누군가 계획적으로 혹은 충동적으로 저지른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것이 외국의 이야기일 리는 없다. 우리나라라고 트랜스 살해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살률은 뭐, 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나라는 그 사건들이 가시화조차 되지 못하는 환경들인 것뿐이다.
그래서 계속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 스스로와 싸워야 하고, 사회와 싸워야 하고, (어떤 이들은) 평생 살해의 두려움이 살아야 하는 상황. 가시화와 법 제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많은 것들. 어떤 것이 우선순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우선순위일 수밖에 없는 상황들. 하지만,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할 수는 없는 상황들. 이 상황에서 도대체 뭘 해야 하는 걸까.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음에 고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가 싶다가도, 고민마저 사치이고, 우리는 트랜스 ‘운동’을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오묘한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도, 그리고 다행히도, 그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정답이 절대 아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일단, 이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해의 공포에서, 차별의 고리에서, 경제적 압박에서, 그리고 사회의 시선에서 일단은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
살고 보자. 쥐 죽은 듯이 살아도 좋고, 온 세상에 커밍아웃을 하며 살아도 좋다. 매일매일 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해도 좋지만, 그냥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좋아요”만 눌러도 좋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생명보전만 하면서라도 살아가자, 여하튼 살아가보자.
활동가는 꼭 글을 잘 써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활동가는 꼭 말을 조근조근 잘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활동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활동가는 모두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활동가는, 트랜스 활동가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계속 살아갈 것임을 세상에 속삭이는 사람이다. 조각보 안에서 함께 트랜스 당사자인 내가 있음을, 그리고 지지자인 내가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 받고, 내가 약한 부분을 드러내고, 위안 받고, 그리고 또 살아내면 된다.
어떤 한 개의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해내고, 단체의 위치를 만들어나가고, 단체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것도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살아있음으로 더 안전하고 건강한 내 삶을, 우리의 삶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살아내야 한다. 살아내서 내일의 삶을 만나기 위해, 내 삶으로 다른 사람의 삶도 구하기 위해 살아내야 한다.
그렇게 살아 내다보면, 어느 순간 우리의 운동은 더 반짝이고 있을 것이고, 세상이 변화했음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여기까지 왔음을 불현듯 느끼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도 내일도 행복한 캔디.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