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퀴어를 위한 공간은 없다?

 공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특정한 공간과 그 경계짓기는 항상 어떤 행동과 존재가 허용되는지/허용되지 않는지를 가르는 규범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공간의 규범과 불화하며 그 공간에서 누군가가 추방당하는 사례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셀 수 없다. 젠더 퀴어들은 자신이 추구하고 살아가는 젠더 정체성, 젠더 표현 등이 이분법적인 성별을 전제하고 있는 공간에서 부적절한 것, 잘못 위치한 것으로 여겨지며, ‘여/남’을 ‘다양한 정도로’ 분리하는 공간(이를테면, 화장실, 목욕탕, 술집, 학교, 길거리 등등등)으로부터 추방당하곤 한다. 관공서를 가거나 투표를 하러 갈 때, 신분증 상 성별과 인지 상 성별이 불일치한다며 본인이 맞냐고 정체를 의심 당하고, 그에 대한 해명(저 트랜스젠더에요, 저 ㅇㅇ에요.)이 받아들여질 때에만 그 공간을 출입할 수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공항에서 정체를 의심당하고 모욕적인 강제 몸수색을 당한 트랜스젠더들의 사례도 종종 있다. 이는 공항이 누가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인지/없는 사람인지를 판정하고 집행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예로, 퀴어문화축제에서 축제 참여자의 노출이 사회적인 비난의 대상이 된 반면, 신촌물총축제 참여자의 노출은 건강함, 젊음, 활기, 개방성 등의 수사학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같은 행위라도 누가 하는지에 따라서 그 공간과의 적절함/부적절함이 정반대로 나타난 경우다. 이와 같이 퀴어들은 이성애주의와 성별이분법에 기반한 사회에서 많은 공간의 규범과 불화하곤 한다. 

 공간(의 규범)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 공간 만들기에는 그 공간을 기획한 사람, 관리하는 사람, 이용하는 사람 등 다양한 행위자들이 참여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느 한 행위자가 그 공간의 결정권을 독점할 수도 없다는 것, 누구도 공간의 의미를 100%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다양하고, 그 공간에 존재하는 방식 역시 다양하다. 즉, 공간의 규범과 의미는 다양한 정도로 결정지어져 있지만,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그렇기에, 트랜스/젠더/퀴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의 틈새에서, 공간의 문법을 바꿔내고,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며 살아간다.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퀴어들의 공간만들기 방식은 어느 공간을 일시적으로 점유하여 그 공간의 의미를 전적으로 바꾸어내는 것이다. 퀴어문화축제, 서울시청 점거 무지개농성 등은 퀴어들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그 공간을 적극적으로 ‘퀴어화’한 가장 생생한 기억들이다. 신촌 걷고싶은거리, 서울광장, 서울시청 등의 공간은 이성애적 욕망과 소비가 흘러넘치는 공간, 국가 주도의 관행사가 열리는 공간, 공공의 정서와 부합하지 않는다며 퀴어들을 몰아내는 공간이었을지언정, 퀴어를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특히 서울시청 공간은 당시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을 적극적으로 무산시켰던 서울시 시정부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퀴어들이 모이고, 그 공간을 점유하고, 함께 자신을 발화하고 드러냄으로써, 기존 공간의 의미를 극적으로 무너뜨리고 그 공간을 퀴어하게 덧칠한 것이다. 


 그러한 공간만들기는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매년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장소들은 공무원이나 종교에 기반한 반퀴어 세력 등과의 지난한 투쟁의 끝에 얻어낸 성취들이다. 서울시청 점거 역시 시민활동가들이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에 참여하여 오랜 기간 설득과 공감을 이끌어내고, 공청회 장소에 난입해 논의를 무산시켰던 반퀴어 세력과 맞서고, 적합한 절차로 만들어진 인권헌장의 일방적인 폐기에 대해 많은 퀴어들이 분노하고 싸우면서 이루어낸 성취였다. 즉, 퀴어문화축제 장소선정에 대한 조직적인 방해, 서울시민인권헌장 폐기 등은 ‘공공’이라는 공간에 퀴어의 입장권은 없다는 선언이었지만 퀴어들은 스스로 입장권을 부여해 그곳으로 들어갔다. 이 때 퀴어들의 공간 만들기는 함께 저항하며 특정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그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퀴어의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보다 유연한 공간만들기 방식 역시 존재한다. 페이스북에 방대하게 펼쳐져있는 퀴어들의 네트워크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페이스북은 실명제를 운영 정책으로 삼고 있고, 실명(주민등록 상 성명)이 아니라고 판단한 계정은 그 정책을 어겼다는 이유로 블록당한다. 하지만 퀴어들은 다양한 맥락에서 주민등록 상 이름과는 다른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고 불리며 살아간다. 한국의 이름은 대개 출생 당시 부모 등으로부터 부여받을 뿐 아니라, 이분법적 성별에 따라 구분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트랜스젠더들은 주민등록상 이름이 지시하는 성별과 자신의 성별 간의 간극을 경험한다. 이에 많은 트랜스젠더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다시 짓는다. 그렇기에 이름 다시 짓기는 젠더 수행의 일부이자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의 중요한 의례다. 이 때 페이스북의 실명 정책은 명백한 반-퀴어적인 정책이자, SNS 공간에서 퀴어들을 추방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많은 퀴어들은 오늘도 주민등록상 이름과 상관 없는 자신만의 이름으로 페이스북계정을 만들어 다른 퀴어들을 만나고, 교류하고,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페이스북의 실명 정책은 변함 없지만, 그 정책이 페이스북의 모든 관계망을 장악하지는 못 한다. 이는 그 공간 내부에서 공간의 규범을 무시하거나 속이면서, 규범에 반하는 관계와 의미들을 만들어나가는 실천이다. 이러한 와중에 이따금 퀴어 계정들은 블록당하거나, 주민등록증 제출을 요구받기도 한다. 이에 대해 페이스북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중요하며, 앞으로 페이스북의 많은 정책들이 변해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정책을 무시하면서 자신들만의 온라인 공간 만들기에 참여하고 있고, 오늘도 그렇게 만들어진 온라인 공간에는 퀴어한 관계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는 그 공간을 기획/관리하는 사람이 공간의 규범과 의미를 100% 통제하지 못하며, 퀴어들은 반퀴어적인 공간 내부에서도 그 규범을 비껴나가거나, 속이거나, 무시하면서 퀴어한 공간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 전반이 이분법적 성애/젠더에 기반하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떤 공간을 꿈꿀 수 있을까? 모든 공간은 나름의 규범을 가지고 있다. 모든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을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텅빈 공간’을 찾는다는 것이고, 불가능한 꿈일지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다. 특정 공간이 어떤 존재, 행동, 삶을 추방하면서 규범을 생산하는지 살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퀴어들이 어느 공간에든 존재하며 살아가는 방식에 주목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만들어 나가길 멈추지 않는 것이다. 퀴어한 공간 만들기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청소년 성소수자에게 안정적인 장소를 제공하려는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 띵동’, 퀴어들의 안정적인 보금자리를 만들고자 하는 ‘무지개하우스’ 등은 단단한 퀴어 공간을 새롭게 만드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존의 공간을 비틀고, 퀴어화하는 많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반퀴어적인 공간 내부에서부터 그 공간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온 소중한 감각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추방하던 공간을 우리의 공간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배웠고, 이 움직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_수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