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젠더의 관념들이 서서히 하나의 자유로움을 찾아나간다곤 해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틀 안에서 구성되고 있다. 우리가 선택하는 말투, 행동, 옷차림, 우리 정체성에 속하는 그 전부가 이 틀 안에서 평가 받는다. 평균의 기준에서 남자는 남성성, 여자는 여성성이 높아야 가치가 올라가고 그 구조에서 벗어날수록 젠더의 개념에서 멀어져 존재감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사회적 산물이라는 의견을 부인하기 힘들다. 젠더 정체성이 선천적인 요소들로만 구성되었다는 관점은 극도로 본질주의(essentialism)적이고 시스젠더(cisgender)위주 묘사 속에서 편견적인 성차별(sexism)을 집행한다. 전반적으로 젠더 이분화된 사회 구조 내에 존재하는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은 특히 논쟁적일 수 있다. 여성에서부터 남성으로 (male to female) 또는 남성에서부터 여성으로 (female to male) 트랜지션(transition)하는 트랜스젠더들은 이 성별 이분화된 제도를 오히려 더 강조한다는 의견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트랜스젠더라는 용어가 많은 의미를 포괄한다는 주장이 있다. FTM과 MTF 외 논-바이너리(non-binary), 젠더플루이드(genderfluid), 젠더리스(genderless), 등등 트랜스젠더는 많은 정체성을 포함하는 포괄용어(umbrella term)로 쓰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대중적으론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는 FTM/MTF과 많이 연관된다. 이런 의미에서 다수의 트랜스젠더들은 어쩌면 고정적으로 성별화된 체제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이분화된 틀 안에서 자신을 정체화하는 바이너리(binary) 트랜스젠더들은 자기 자신의 성 정체성에 맞게 생각되기 위해 지정된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과도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볼 수 있다. 여성들은 화장을 과하게 하거나 조금 노출적인 옷을 입기도 하고, 남성들은 지나치게 터프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자신이 자신의 몸에서 느끼는 불쾌감을 과잉 보상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트랜스젠더에게 젠더표현(gender expression)은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무기이자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일 수 있다. 그들의 이러한 행위 없이는 편견 속의 편견 안으로 몰아붙이는 사회의 억압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에, 바이너리 트랜스젠더들은 많이 힘들곤 한다. 누구든 사회가 자기 자신을(젠더든, 국적이든, 나이든) 매번 틀리게 착각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젠더이분법(gender binary)이란 무엇일까? 요약해서 말하자면 젠더이분법은 성별이라는 개념 안에 포함되는 성 정체성, 성 역할, 생물학적인 외형적 특성이 모두 궁극적으론 명확하게 두 개만으로 갈라진다고 판단하는 하나의 사회적 제도이다. 이렇게 두 개의 성별은 서로를 반대작용을 하며 하나가 아닌 것들은 서로 상호 강화한다. 오늘날, 이 틀의 정의 밖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정체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진보주의적인 사상가들은 성별 이분법을 사회역사의 탄압적인 요소로 본다. 많은 페미니스트 이론가들도 이분화된 문화가 성차별의 큰 원인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체계는 아직도 엄청난 사회 문화적 권력을 지니고 있고, 이에 대해 해결책이 없는 게 현실이다.
젠더이분법에 대해 깊이 생각하려면, 먼저 젠더라는 개념에 대해 질문해 보아야 한다. 젠더란 무엇일까? 과연 여자는 무엇일까? 남자는? 생물학적인 몸을 떠나면 성이라는 생각 자체가 신체적으로 작용될 수 있을까? 오히려 어느 하나의 생각을 남성적인 사상, 여성적인 사상이라고 지정하는 행위 자체가 편견에 젖은 비하적인 발언 아닐까? ‘남자라서 이해 못해’, ‘여자들은 다 그렇잖아’ 이런 표현들이야 말로 존재하는 이분화된 편견으로부터 내뱉어지는 말이 아닐까?
페미니스트 쥬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젠더는 하나의 퍼포먼스, 즉 수행이라고 주장한다. 이 젠더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 이론을 따르면 젠더는 항상 행위로 정의되는 요소이다. (‘[…] gender proves to be performance—that is, constituting the identity it is purported to be. In this sense, gender is always a doing, though not a doing by a subject who might be said to pre-exist the deed’). 이런 주장에 따르면 ‘선험적으로 주어진 정체성이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라는 생각이 뒤바뀌어 ‘행동이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라는 구조를 이루게 된다. 즉 버틀러의 사상을 따르면 젠더는 타고난 하나의 체질이 아니라 배우고 표현해내는 행위일 뿐이다. 이로써 젠더로 만들어지는 개인의 정체성은 수행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20세기 페미니즘의 가시화 초기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eoir)도 생물학적인 본질주의(essentialism)에서 벗어나 젠더 정체성이 선천적이라기보다 양육되는 하나의 성격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보부와르는 실존주의적인 관점에서 젠더를 해석하며 실존주의페미니즘을 내세웠다. 사르뜨르(Sartre)의 ‘실존은 본질 앞에 선다(l’existence precede l’essence)’라는 명제를 기반으로 그녀는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on ne nait pas femme on le devient)’ 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렇게 젠더를 사회적 구성으로 이해하면 트랜스젠더도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 둘다 수행성 밑에서 정의 된다면 남성적인 몸 또는 여성적인 몸보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페니스와 바자이나도 하나의 젠더와 연관하는 건 편견이다.
그럼 젠더에 대한 관점에서 벗어나, 생물학적인 성(sex)만 보면 남/여 이분법 관점은 제대로 작동하는가? 여자든 남자든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 사이엔 분명 신체적인 특징과 기능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경험의 일부도 다르고, 각자가 경험하는 사회적 압박과 차별이 전부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재생산을 둘러싼 억압도 달리 경험되곤 한다. 한국에서 시스젠더 여성에게는 출산과 모성의 신성함을 이유로 낙태의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 반면에, 트랜스여성에게는 자궁 없는 몸이자 '페니스'가 있는 몸으로 진짜 여자로 인정할 수 없으니 생식능력을 비가역적으로 제거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것은 다른 몸에 대하여 다르게 작동하는 사회적 차별이다. 이런 사고방식속에서 추론하면 트래스젠더와 시스젠더 사이에 육체적으로 구체화되는(materialization) 과정은 확고하게 다르다. 반면이런 사고도 하나의 관점에 불구하다 성(sex) 자체가 명확히 두 개의 이성으로 분리된다는 주장은 너무나 단순 무식한 사고다.
트랜스젠더 존재를 반대하는 하나의 주장은 트랜스젠더가 (특히 성기수술을 한 트랜스젠더의 경우) 생식능력이 없어 진정한 남성/여성으로 인정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어쩌면 트랜스젠더는 사회가 이상화하는 신체적 완벽성과 정상에서 멀어진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트랜스남자/여자들이 성별로는 받아들여져도 생물학적으론 정체화하는 성(sex)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면, 이 성(sex)의 기준을 못 미치는 시스젠더도 자기의 성(sex)정체성을 거부당해야 하는가? 유방암으로 가슴을 잃은 시스젠더 여자는 여성이 아닌가? 불임의 시스젠더 남자는 남성이 아닌가?
정체성에 대한 논의에 있어 과연 ‘육체와 정신’ 조차도 명확하게 이분화 할 수 있을까? 하나의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관점을 인용해보자. 인식론비평에서의 데카르트(Descartes)와 같이, 존재로서 모든 것을 부정하고 비판한다면, 생각한다는 그 자체만이 확연한 하나의 진실이다(‘Dubito ergo cogito ergo sum’). 사람의 모든 개념은 생각으로부터 정의되고 기준화된다. 그 정의와 기준은 추상적인 하나의 과정일 뿐이고 완벽하지 못하다. 생각만이 우리의 존재성을 증명할수있다면 그렇다면 생각으로부터 창작된 모든 부차적인 정의와 사상은 과연 존재의 진실을 넘어 개인을 정체화할 수 있을까?
요즘은 의학계에서도 성(sex)이 외견상 이분화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는 흐름도 있다. 명확할 것이라 간주되던, 몸(외형/기능)을 근거로 하는 의학적 남/여 구분도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 논쟁의 대상이다. 1950년대부터 연구된 안드로겐 무감응 증후군(Androgen insensitivity syndrome)과 같은 증상들은 사람의 염색체는 XY와 XX으로만 나눠져 있다는 인식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명확해보이는 의료적/해부학적 구분 역시 인터섹슈얼 운동을 통해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받고 있으며,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슈얼, 논-바이너리 성별 정체성의 존재는 우리 사회가 섹스와 젠더를 어떻게 구분하려 하는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나아가 시스/트랜스 사이의 경험차가 과연 그렇게 확고한 근거가 있는 것인지 되물을 것을 끊임없이 종용한다.
트랜스젠더는 지정된 하나의 성별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나는 존재이다. 트랜지션이란 단순히 하나의 성별에서 다른 성별로의(정체성) 이행이 아니다. 트랜지션은 지정 성별이라는 고정관념에 반항하는 혁명이다. 물론 일부 트랜스젠더 묘사 안에서 성차별적인 편견들이 가시화될 수도 있지만, 사회의 권위적인 구조 밖에서 진정된 자신에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야말로 성별이분법을 전복하는 행위이다.
트랜스젠더의 Trans라는 접두사는 라틴어로 ‘건너’라는 의미도 갖고 있지만 ‘능가하는’ 또는 ‘넘는’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트랜스젠더는 그런 면에서 젠더 개념 자체를 뛰어넘는 이상적인 존재가 아닐까?

_다니
최근 젠더의 관념들이 서서히 하나의 자유로움을 찾아나간다곤 해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틀 안에서 구성되고 있다. 우리가 선택하는 말투, 행동, 옷차림, 우리 정체성에 속하는 그 전부가 이 틀 안에서 평가 받는다. 평균의 기준에서 남자는 남성성, 여자는 여성성이 높아야 가치가 올라가고 그 구조에서 벗어날수록 젠더의 개념에서 멀어져 존재감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사회적 산물이라는 의견을 부인하기 힘들다. 젠더 정체성이 선천적인 요소들로만 구성되었다는 관점은 극도로 본질주의(essentialism)적이고 시스젠더(cisgender)위주 묘사 속에서 편견적인 성차별(sexism)을 집행한다. 전반적으로 젠더 이분화된 사회 구조 내에 존재하는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은 특히 논쟁적일 수 있다. 여성에서부터 남성으로 (male to female) 또는 남성에서부터 여성으로 (female to male) 트랜지션(transition)하는 트랜스젠더들은 이 성별 이분화된 제도를 오히려 더 강조한다는 의견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트랜스젠더라는 용어가 많은 의미를 포괄한다는 주장이 있다. FTM과 MTF 외 논-바이너리(non-binary), 젠더플루이드(genderfluid), 젠더리스(genderless), 등등 트랜스젠더는 많은 정체성을 포함하는 포괄용어(umbrella term)로 쓰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대중적으론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는 FTM/MTF과 많이 연관된다. 이런 의미에서 다수의 트랜스젠더들은 어쩌면 고정적으로 성별화된 체제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이분화된 틀 안에서 자신을 정체화하는 바이너리(binary) 트랜스젠더들은 자기 자신의 성 정체성에 맞게 생각되기 위해 지정된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과도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볼 수 있다. 여성들은 화장을 과하게 하거나 조금 노출적인 옷을 입기도 하고, 남성들은 지나치게 터프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자신이 자신의 몸에서 느끼는 불쾌감을 과잉 보상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트랜스젠더에게 젠더표현(gender expression)은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무기이자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일 수 있다. 그들의 이러한 행위 없이는 편견 속의 편견 안으로 몰아붙이는 사회의 억압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에, 바이너리 트랜스젠더들은 많이 힘들곤 한다. 누구든 사회가 자기 자신을(젠더든, 국적이든, 나이든) 매번 틀리게 착각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젠더이분법(gender binary)이란 무엇일까? 요약해서 말하자면 젠더이분법은 성별이라는 개념 안에 포함되는 성 정체성, 성 역할, 생물학적인 외형적 특성이 모두 궁극적으론 명확하게 두 개만으로 갈라진다고 판단하는 하나의 사회적 제도이다. 이렇게 두 개의 성별은 서로를 반대작용을 하며 하나가 아닌 것들은 서로 상호 강화한다. 오늘날, 이 틀의 정의 밖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정체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진보주의적인 사상가들은 성별 이분법을 사회역사의 탄압적인 요소로 본다. 많은 페미니스트 이론가들도 이분화된 문화가 성차별의 큰 원인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체계는 아직도 엄청난 사회 문화적 권력을 지니고 있고, 이에 대해 해결책이 없는 게 현실이다.
젠더이분법에 대해 깊이 생각하려면, 먼저 젠더라는 개념에 대해 질문해 보아야 한다. 젠더란 무엇일까? 과연 여자는 무엇일까? 남자는? 생물학적인 몸을 떠나면 성이라는 생각 자체가 신체적으로 작용될 수 있을까? 오히려 어느 하나의 생각을 남성적인 사상, 여성적인 사상이라고 지정하는 행위 자체가 편견에 젖은 비하적인 발언 아닐까? ‘남자라서 이해 못해’, ‘여자들은 다 그렇잖아’ 이런 표현들이야 말로 존재하는 이분화된 편견으로부터 내뱉어지는 말이 아닐까?
페미니스트 쥬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젠더는 하나의 퍼포먼스, 즉 수행이라고 주장한다. 이 젠더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 이론을 따르면 젠더는 항상 행위로 정의되는 요소이다. (‘[…] gender proves to be performance—that is, constituting the identity it is purported to be. In this sense, gender is always a doing, though not a doing by a subject who might be said to pre-exist the deed’). 이런 주장에 따르면 ‘선험적으로 주어진 정체성이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라는 생각이 뒤바뀌어 ‘행동이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라는 구조를 이루게 된다. 즉 버틀러의 사상을 따르면 젠더는 타고난 하나의 체질이 아니라 배우고 표현해내는 행위일 뿐이다. 이로써 젠더로 만들어지는 개인의 정체성은 수행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20세기 페미니즘의 가시화 초기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eoir)도 생물학적인 본질주의(essentialism)에서 벗어나 젠더 정체성이 선천적이라기보다 양육되는 하나의 성격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보부와르는 실존주의적인 관점에서 젠더를 해석하며 실존주의페미니즘을 내세웠다. 사르뜨르(Sartre)의 ‘실존은 본질 앞에 선다(l’existence precede l’essence)’라는 명제를 기반으로 그녀는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on ne nait pas femme on le devient)’ 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렇게 젠더를 사회적 구성으로 이해하면 트랜스젠더도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 둘다 수행성 밑에서 정의 된다면 남성적인 몸 또는 여성적인 몸보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페니스와 바자이나도 하나의 젠더와 연관하는 건 편견이다.
그럼 젠더에 대한 관점에서 벗어나, 생물학적인 성(sex)만 보면 남/여 이분법 관점은 제대로 작동하는가? 여자든 남자든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 사이엔 분명 신체적인 특징과 기능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경험의 일부도 다르고, 각자가 경험하는 사회적 압박과 차별이 전부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재생산을 둘러싼 억압도 달리 경험되곤 한다. 한국에서 시스젠더 여성에게는 출산과 모성의 신성함을 이유로 낙태의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 반면에, 트랜스여성에게는 자궁 없는 몸이자 '페니스'가 있는 몸으로 진짜 여자로 인정할 수 없으니 생식능력을 비가역적으로 제거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것은 다른 몸에 대하여 다르게 작동하는 사회적 차별이다. 이런 사고방식속에서 추론하면 트래스젠더와 시스젠더 사이에 육체적으로 구체화되는(materialization) 과정은 확고하게 다르다. 반면이런 사고도 하나의 관점에 불구하다 성(sex) 자체가 명확히 두 개의 이성으로 분리된다는 주장은 너무나 단순 무식한 사고다.
트랜스젠더 존재를 반대하는 하나의 주장은 트랜스젠더가 (특히 성기수술을 한 트랜스젠더의 경우) 생식능력이 없어 진정한 남성/여성으로 인정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어쩌면 트랜스젠더는 사회가 이상화하는 신체적 완벽성과 정상에서 멀어진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트랜스남자/여자들이 성별로는 받아들여져도 생물학적으론 정체화하는 성(sex)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면, 이 성(sex)의 기준을 못 미치는 시스젠더도 자기의 성(sex)정체성을 거부당해야 하는가? 유방암으로 가슴을 잃은 시스젠더 여자는 여성이 아닌가? 불임의 시스젠더 남자는 남성이 아닌가?
정체성에 대한 논의에 있어 과연 ‘육체와 정신’ 조차도 명확하게 이분화 할 수 있을까? 하나의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관점을 인용해보자. 인식론비평에서의 데카르트(Descartes)와 같이, 존재로서 모든 것을 부정하고 비판한다면, 생각한다는 그 자체만이 확연한 하나의 진실이다(‘Dubito ergo cogito ergo sum’). 사람의 모든 개념은 생각으로부터 정의되고 기준화된다. 그 정의와 기준은 추상적인 하나의 과정일 뿐이고 완벽하지 못하다. 생각만이 우리의 존재성을 증명할수있다면 그렇다면 생각으로부터 창작된 모든 부차적인 정의와 사상은 과연 존재의 진실을 넘어 개인을 정체화할 수 있을까?
요즘은 의학계에서도 성(sex)이 외견상 이분화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는 흐름도 있다. 명확할 것이라 간주되던, 몸(외형/기능)을 근거로 하는 의학적 남/여 구분도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 논쟁의 대상이다. 1950년대부터 연구된 안드로겐 무감응 증후군(Androgen insensitivity syndrome)과 같은 증상들은 사람의 염색체는 XY와 XX으로만 나눠져 있다는 인식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명확해보이는 의료적/해부학적 구분 역시 인터섹슈얼 운동을 통해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받고 있으며,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슈얼, 논-바이너리 성별 정체성의 존재는 우리 사회가 섹스와 젠더를 어떻게 구분하려 하는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나아가 시스/트랜스 사이의 경험차가 과연 그렇게 확고한 근거가 있는 것인지 되물을 것을 끊임없이 종용한다.
트랜스젠더는 지정된 하나의 성별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나는 존재이다. 트랜지션이란 단순히 하나의 성별에서 다른 성별로의(정체성) 이행이 아니다. 트랜지션은 지정 성별이라는 고정관념에 반항하는 혁명이다. 물론 일부 트랜스젠더 묘사 안에서 성차별적인 편견들이 가시화될 수도 있지만, 사회의 권위적인 구조 밖에서 진정된 자신에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야말로 성별이분법을 전복하는 행위이다.
트랜스젠더의 Trans라는 접두사는 라틴어로 ‘건너’라는 의미도 갖고 있지만 ‘능가하는’ 또는 ‘넘는’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트랜스젠더는 그런 면에서 젠더 개념 자체를 뛰어넘는 이상적인 존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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