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개인후기[칼럼]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을 바라보며

2019-12-31

law-158356_960_720.png






2018년 12월 5일.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법사위를 통과했고 이틀 뒤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아마 그 과정을 지켜보며 복잡한 기분을 느낀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 같네요. 특히 저에겐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의 내용에서 사실상 gender violence에 대한 내용이 실종되었다는 점이 너무나 크게 다가왔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놀랍거나 당황스럽지는 않았습니다. 또 소식을 접한 뒤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을 제정하기 위해 사람들이 해온 노력과 고난을 볼수록 오히려 존경심에 가까운 마음이 더 들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시감마저 느껴지는 그 과정은 입맛을 씁쓸케 했습니다.

‘정치역학에서 타협은 필수이다.’ 정치학을 배울 때 교수님이 즐겨하신 말이고 저도 공감하고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일어난 희극적 상황이 적지 않죠. 특히 2013년 강간죄 성립요건이 크게 바뀌었던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 있던 유사강간죄를 굳이 만들어 성교와 성교 아닌 것을 구분하고 가해자가 삽입해야지만 성립되는 참 희극적인 법 개정이 기억납니다. 물론 이 개정으로 성폭력으로 피해를 입는 성소수자가 법률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생겼기에 굳이 말하자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지만요.

차별금지법도 당시로 돌아가면 참 긴박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시한 안은 혐오세력의 말을 들은 법무부에 의해 ‘타협’의 대상이 되려고 했죠.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이 빠진 것을 비롯해 병력, 언어, 출신국가 등이 빠진 반쪽짜리 안이 입법예고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입법을 막기 위한 수많이 소수자 단체와 이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 끝에 수정안이 통과되는 참사가 일어나진 않았지만, 차별금지법과 같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법에서도 타협은 여지 없이 일어나려 했지요. 씁쓸한 기억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타협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핵심적인 곳에서 타협이 일어났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네요. 여성폭력의 정의가 바뀌면서 법률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입니다. 법사위에서 더불어민주당 송기헌 의원이 한 말 이 머리에 멤도네요. ‘최초로 이 법이 보호하려고 하는 대상이 100 이라고 하면 실제로 여성만 대상으로 하면 그 범 위가 85나 90으로 줄어든다고 할 거예요. 그러면 100은 안 되더라도 90을 보호하는 정도 수준으로 해서 입법을 할 건지 판단하셔야 됩니다. 더 이 상 끌 수는 없어요.’ ...그 말을 수용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비난만 할수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같은 회의에서 언급되었듯 누군가는 “동성애법”이니 뭐니 하는 식의 지적을 하고, 간신히 통과를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는데 지금 실패하면 앞으로 영영 기회를 잡을 수 없다는 두려움도 있었겠죠. 하지만 기본법은 관련된 수많은 법률 및 행정에 영향을 줍니다. 앞으로 대한민국 사법/입법/행정에 영향을 줄 기본법에서   손상된 취지가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앞으로의 해석과 사회에서 적용되는 양상을 봐야겠지만 우리는 과거 다른 나라가 여성폭력/젠더폭력을 둘러싸고 수십년간 했던 논쟁과 시행착오를 쓸데 없이 무의미하게 반복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 통과된 이후 바로 개정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말 잘된 일이고 또 응원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원안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겠죠. 특히 입법과정에서 트랜스젠더퀴어에 대한 담론과 생각이 전혀 담기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지금 이 법이 원안에서, 그리고 현재의 법안에서 당사자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또 원안과 현재의 법안이 한국의 제도가 젠더폭력을 인지하는 방식을 어디까지 반영하고, 또 앞으로 한국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구조와 거기서 나타나는   젠더폭력을 어떤 방식으로 대처하려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지도 살펴봐야겠죠.  조각보는 앞으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추구하는 바, 즉 젠더폭력의 방지에 트랜스젠더퀴어에 대한 고민이 담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별이분법을 당연한 사실이라고 가정한 채 형성되어온 젠더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해부하고 재정립하려 합니다.

조각보는 앞으로 여성폭력방지기본법 자체와 법률의 대상이 될 다른 제도 및 사회적 이슈들을 트랜스젠더퀴어적 관점에서 탐구할 것입니다. 또 여성폭력방지법뿐만 아니라 성별이분법을 기반으로 형성된 수많은 제도와 관습을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그 방향성이 지금의 개정 준비를 비롯해 지금까지 있었던, 그리고 앞으로 있을 수많은 이슈에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또다시 타협 속에서 트랜스젠더퀴어의 삶이 침묵 속에  일방적으로 휩쓸리는 일이 없도록 차근차근 놓치는 것 없이 준비해 나가겠습니다.



_조각보 활동가 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