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개인후기쉴라 제프리스 초청강연 [젠더박살 프로젝트] 참여 후기
2019-12-31
쉴라 제프리스 초청강연 [젠더박살 프로젝트] 참여 후기
<젠더는 해롭다> p. 39-40
보수적인 특정 종교단체의 혐오발언이 아닙니다. 쉴라 제프리스는 이처럼 생물학적 성별에 기반한 여성의 공간과 권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트랜스젠더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여성 공간을 침범하기 위한 존재’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학자 중 한 명입니다.
새로운 결의 트랜스혐오가 점점 가시화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지난 9일에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렸던 열다북스와 인천여성의전화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쉴라 제프리스 초청 강연, [젠더박살 프로젝트]에 다녀왔습니다. 인천여성의전화는 [젠더박살 프로젝트]를 여는 입장문에서 ‘젠더를 박살낼 페미니즘’ 이라고 말했습니다. (쉴라와 주최 측이 어떻게든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려 노력하는) 트랜스젠더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또 페미니스트로서 이들이 말하는 젠더는 대체 무엇이고, 페미니즘적으로 젠더를 박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 후기를 함께 공유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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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열다북스에서 주최한 쉴라 제프리스에 강연에 참석했다. 몇 분 늦게 도착해서 강연장은 벌써 이미 다 차 있는 상태였다. 신청자를 300명이나 받았음에도 티켓팅이 마감이 된 행사였으니까 예상 밖은 아니었다. 내가 강연장에 들어섰을 때 쉴라는 이미 무대에서 강연을 하고 있었다. 들어가자 마자 내 귀에 들리는 이야기는 크로스드레서와 포르노 이야기.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이고 수도 없이 읽어본 주장이지만 이런 강연에서 듣는 건 처음이었다.
“트랜스여성이라는 건 없다. 그냥 크로스드레서이다.”
“여자 교복을 입고 립스틱을 바르면 자신을 더 낮은 지위에 놓고 그것에 성적 쾌감을 느낀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관중은 역겨워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어떻게 이런 말들을 내뱉을 수가 있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동의할 수 있는 거지? 쉴라는 엄청나게 생생한 장면들은 그려낸다. 대부분 성적인 내용이고 트랜스여성의 문란함을 강조하며 그들을 성범죄자와 비교한다. 트랜스여성을 공포스럽고 혐오할만한 존재물로 만들어갔다. 여기에서 쉴라에 한 마디 한 마디가 관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아마도 진실이 되겠지. 이미 마음을 정하고 온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과연 이 사람들 중 트랜스여성을 만나본 사람은 있는 걸까?
“트랜스젠더하는 이들은 더욱더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적 쾌감을 찾아 여자 화장실을 포함한 공공장소에서 여장한 채로 다닙니다. 여장을 한 상태에서 여자 화장실에서 여성분들께 악수를 요구하기도 하며 그 행위에 사정을 합니다.”
쉴라의 말을 들으면서 고정관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 내가 아는 페미니즘 운동은 고정관념과 맞서 여성 인권을 위해 싸워왔다. 지금까지 수많은 고정관념을 깨며 평등을 추구해왔다. ‘여성은 약하다,’ ‘여성은 소극적이다’와 같은 선입견을 파괴하기 위해 무수한 노력과 운동이 필요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부장적인 체제가 강요하는 고정관념에 기반한 주장들에 우리는 저항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 이 강연에서 그려지고 있고 열다북스가 SNS를 통해 내세우는 트랜스젠더 역시 고정관념일 뿐이지 않을까? 쉴라가 말하는 이 성적 쾌감과 판타지만을 추구하는 트랜스젠더,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이성애 규범에 집착하여 ‘트랜스젠더’하는 ‘레즈비언’도 존재하기는 할 것이다. 다만 특수한 몇몇 사례를 근거 삼아 트랜스젠더 전체를 모두 흉직한 집단으로 정의하는 건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다. 호응하는 청중들은 진짜로 대부분의 트랜스젠더가 이렇다고 믿는 것일까? 실제로 레이 블랜차드(Ray Blanchard)의 논문처럼 구식이고 근거 없는 연구들을 기반으로 하여 트랜스젠더를 정의내리는 방식에 다들 만족하는 것인가?
쉴라가 이 강연에서 하는 이야기는 1979년 트랜스젠더를 비판한 또 하나의 대표적인 책 <트랜스섹슈얼 제국(The Transsexual Empire: The Making of the She-Male)>에 나오는 생각들과 흡사하다. 몇 년 전에 출판된 쉴라의 <젠더는 해롭다>의 감사의 말에서도 쉴라가 <트랜스섹슈얼 제국>의 저자인 재니스 레이몬드(Janice Raymond)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 두 사람의 주장은 앞서 말한 편견들로 가득 차 있어 보인다. 트랜스젠더를 정의하고 설명하려 할 때 자기들의 세계관에 맞는 사례에만 집착하고 증거 삼아 논리를 전개하다 보니 인지부조화 현상을 나타내고 있는 건 아닐까?
‘트랜스젠더가 여성성 또는 남성성을 강조한다.’ 완전히 틀린 말만은 아니다. 다만 트랜스젠더라서 성별 이분법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트랜스젠더의 성별성도 사회에서 용납되는 언어와 행동을 반영할 뿐이다. 이것은 비트랜스젠더도 마찬가지 아닌가? 왜 트랜스젠더에게만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하는가? 트랜스젠더만 이상적인 기준에서 평가하는 것은 극히 불공평하다. 더불어 대다수의 트랜스젠더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은 생존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자신의 젠더 표현에 맞는 패싱이 안됨으로써 야기될 폭력과 불이익에 맞서기 위한 위장이다. 물론 여성 인권을 위해 앞장서는 트랜스젠더도 많다. 하지만 모두가 이런 활동이나 운동을 할 여력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고정관념으로 고정관념에 맞서는 건 페미니스트로서 위선적인 행동이 아닐까? 트랜스여성은 전부 성적 판타지에 갇힌 변태일 뿐이자 자기여성애자(autogynephile)이고, 트랜스남성은 여성이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억압으로부터 도피하는 ‘트랜스젠더하는’ 이들. 이런 묘사들이야말로 편견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인 것 같다.
젠더는 그저 라벨이고 틀일 뿐이다. 이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각 개인에게 달려있다. 물론 젠더라는 용어가 지니는 개념에 의해 발생하는 억압도 있다. 틀은 준거를 만들어내고, 준거에 어긋난 행위와 존재는 억압할 대상이 된다. 그래서 나도 젠더를 아예 없애자는 운동에 반대하지 않는다. 더불어 레디컬 페미니즘의 여러 사상들에는 예전부터 동의해왔다. 젠더가 없음으로써 모두가 더욱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을 꿈꿔보기도 한다. 많은 트랜스젠더들도 젠더의 불필요성을 언급해왔다. 하지만 현재로선 젠더는 존재하고 있고, 그 젠더를 통해 자기 자신을 정체화하는 사람들이 많다, 트랜스젠더든 비트랜스젠더든. 이들에게 있어 젠더는 일상이자 생존수단이며 그리고 삶의 일부를 뜻하기도 한다. 마치 성노동에 대한 비판과 같다. 근본적으로는 성노동이 여성을 상품화하고 올바르지 않은 성문화를 퍼뜨린다 하여도 성노동 자체가 생존수단인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사회가 짜놓은 이상의 틀에 맞춰 살아갈 수 있는 것도 권력이지 않을까? 이 틀에 곱게 맞춰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을 폄하하고 비가시화 하는 것도 권력의 작용이지 않을까?
왜, 그리고 언제부터 트랜스젠더가 이렇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페미니즘이 현재 직면한 수많은 문제들 중에서 왜 하필 트랜스젠더를 골랐을까? 쉴라 제프리스의 책을 번역하고 그를 해외에서 강연자로 섭외해와야 할 만큼 트랜스젠더가 두려운 현상인가 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레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겐 가부장제와의 전쟁에서 가장 시급한 이슈는 트랜스젠더 문제란 말인가? 아니면 오로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이고 적으로 삼기 손쉬운 상대로 택한 것은 아닐까? 열다북스의 이러한 활동은 오늘날 정치판에서 너무나도 흔하게 목격할 수 있는 포퓰리즘과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쉴라가 했던 말 중 인상 깊었던 말이 있다. 여성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툼에 대한 질문에 답이자 플로린스 케네디(Florynce Kennedy)의 가설 ‘수평적 적대감’에 대한 발언이다. ‘수평적 적대감은’ 피억압 계층이 억압 계층에게는 직접 저항할 수 없으니 다른 억압 당하는 계층에게 수평적으로 적대감을 보이는 것이라고 쉴라는 설명했다. 지금 트랜스젠더를 향한 적대감이야말로 이에 대한 적절한 예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도 트랜스여성의 타이틀을 빌려쓰고 있는 한 명으로서,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 이 강연은 너무 증오와 혐오로 가득 차 있다 느꼈다. 트랜스젠더를 악마화하며 하나의 목적을 바라보는 ‘젠더박살 프로젝트’는 이분법적이고 이차원적으로 젠더를 다루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행사의 주최 측은 대화에 응하지는 않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 젠더의 대한 고민과 갈등에 대해 같이 이야기 나누고 싶은 바이다.
_ 조각보 활동가 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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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성플라자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강연장은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비록 바라보는 방향과 가치는 다를지라도, 어찌 되었든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현장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강연은 ‘트랜스젠더는 트랜스젠더리즘이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실재하지 않는) 존재’임을 강조하며 시작되었습니다. 트랜스젠더리즘은 성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존재들을 만들어내고 수호하는 이데올로기이며, 이는 곧 ‘젠더권과 여성 인권의 충돌’을 일으키고, 그렇기에 (트랜스)젠더의 존재는 여성 인권에 해로우며 이것을 박살내는 것이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의 원동력이고 핵심이란 결론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쉴라 제프리스는 강연 도중 트랜스젠더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폐해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강조하면서, 트랜스젠더는 여성 고유의 공간을 박탈한다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 대목에서 월경/출산과 관련된 부분을 지원하는 센터에 ‘여성’이 아닌 성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던 영국의 사례를 들어 ‘트랜스젠더리즘의 폐해’의 예시라고 말하며, "마치 남성도 월경이나 임신이 가능하다는 망상”이라고 설명하였는데요.
사실 트랜스젠더리즘과 트랜스젠더가 만드는 폐해를 언급하며 트랜스여성만 강조하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가부장제-남성 중심 사회의 트랜스혐오 또한 주로 가시화된 혐오는 트랜스여성을 향해 나타났으니까요. 덧붙여 이성애자 트랜스여성을 두고 동성애자 남성의 트랜스베스타잇 페티쉬라 일컫고, 레즈비언/바이섹슈얼 트랜스여성에 대해서는 이성애자 여장 남자 등으로 지칭하며 트랜스여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성적 지향과 욕망 대해 언급하였음에도 트랜스남성에 대해서는 레즈비언의 (이성애 규범을 따르기 위한) 트랜스젠더화 라고만 언급되더군요. 트랜스남성은 모두 여성애자밖에 없을 것이란 데에 상당한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 꽤 흥미로웠습니다. 이쯤에서 존재를 부정하는 데에서도 존재가 지워지는 나의 비-이성애자 트랜스남성 친구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여하튼 현실에서는 정말로 남성도 월경이나 출산을 합니다. 트랜스남성도 월경을 하고, 어떤 이들은 임신과 출산을 선택하고, 때로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해 안전한 임신중절을 필요로 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그들(트랜스남성)은 여자다. 여성 신체를 지닌 자이기 때문에 월경을 하는 것이니 월경/임신/출산에 대한 담론에서 성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하자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라고 말하겠지요. 그렇지만 제가 앞서 말했듯이 트랜스젠더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현실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법적 성별 변경에 있어 우리나라와 달리 의료적 조치(생식능력 제거, 외과적 수술)등을 요구하지 않는 국가들의 경우 법적으로도 남성이고, 남성으로 패싱되면서 월경/임신의 당사자인 이들도 존재합니다.
문제는 트랜스남성의 월경/임신은 분명히 존재함에도 비가시화되고 심지어 당사자들 사이에서도 터부시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트랜스남성 당사자들은 기존의 제도와 지원 체계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여 있고 의료적 지원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쉴라의 바람과는 다르게 월경/임신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이라 표기된 신분증을 지니고 있고 남성으로 인식되는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실에 존재합니다.
물론, 단어 하나를 성중립적으로 바꾼다고 이러한 터부와 비가시화가 한 순간에 뾰롱 하고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는 주류의 언어이며 사회가 무엇을 정상적으로 여기고 있는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언어에서 소외되는 이들은 기존의 제도와 담론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입니다. 페미니즘 담론에서 자궁을 포궁이라 지칭하는 등 대안적 언어를 고안하고 사용하려는 움직임과 비슷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젠더는 해롭다> 번역본에서도 ‘아내’가 아닌 ‘여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지요.
말 그대로 임신/출산의 당사자에 해당되는 여성들을 두고 ‘임신/출산의 당사자’로 호명하는 것이 어째서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으로 읽히는 걸까요? 아일랜드에서 낙태죄가 폐지되고 안전한 임신중절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률이 새로 제정될 때, 아일랜드의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Transgender Equality Network Ireland가 트랜스젠더(특히 트랜스남성)도 임신중절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법안에서 성별중립적인 단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며 했던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안전한 임신 중절을 위한) 새로운 법안은 여성들에게 분명 크나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법안에 트랜스젠더가 포함된다 하여, 여성의 권리가 제한되거나 줄어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말 그대로입니다. 트랜스젠더와 같이 제도와 지원체계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접근권을 높인다고 여성에 대한 지원 체계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또한 쉴라의 강연에서 디트랜지션(detransition,트랜스젠더 당사자가 진행했던 의료적 조치를 다시 되돌리는 것)에 대해 언급한 부분도 우려스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쉴라는 강연에서 디트랜지션, 특히 의료적 트랜지션을 선택한 이성애자 트랜스남성이 나중에 그 결정을 철회하고 디트랜지션을 진행하며 다시 레즈비언으로 재정체화를 하는 것을 두고 ‘트랜스젠더리즘이 허상임에 대한 레즈비언 자매들의 증언이자 반격’이라고 말했는데요, 이러한 시선 때문에 의료적 트랜지션을 진행하였거나 고민 중인 당사자들 사이에서 디트랜지션에 대한 이야기가 터부시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낙태죄 폐지 담론에서 가장 유명한 슬로건 중 ‘My Body, My Choice’ 라는 말이 있지요. 내 몸에 대한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선택은 오롯이 나의 것입니다. 디트랜지션을 선택하는 이유는 많습니다. 한때 나의 신체에 불편감을 느끼고, 그것을 디스포리아로 인식하여 의료적 트랜지션을 선택했더라도 나중에는 그러한 결정을 철회하고 선택지를 다시 되돌리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의료적 트랜지션을 진행하던 중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발생했다거나, 신체 변화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던가, 쉴라가 언급했던 사례들처럼 막상 의료조치를 진행하고 나서 나의 성별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의료조치를 선택했던 당시에 스스로의 몸에 대해 느꼈던 감정과 불편감은 분명 실재하는 것이었고, 지금 느끼는 몸에 대한 감정 또한 오롯이 당신의 것입니다. 트랜스젠더에게 의료조치를 강요하는 것이 부당한 일인 것처럼, 진행한 의료조치를 다시 되돌리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당사자로서의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혐오 논리에 이용될 것이라며 말하지 못 하게 제약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트랜스젠더의 안전한 의료조치에 대한 지원을 논의하는 만큼 디트랜지션에 대한 논의도 계속해서 이어져야 합니다. 그에 앞서, 쉴라의 강연처럼 디트랜지션이 트랜스젠더 혐오 논리를 퍼뜨리는 데에 악용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고요. 디트랜지션을 선택한 ‘FTM 스펙트럼’의 당사자들이 모두 쉴라의 말처럼 ‘돌아온 레즈비언 자매’이지 않을 뿐더러, 누군가의 몸에 대한 선택을 두고 당사자의 동의 없이 이들의 삶을 함부로 규정짓는 것은 지금까지 여성과 소수자가 가부장제가 만든 정상성 규범에서 낙인찍히고 비가시화되었던 방식과 결을 같이 합니다.
이번 강연은 여러모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쉴라는 트랜스젠더 인권 운동은 “이성애자 여장 남자”의 권리를 지켜주는 운동이라 말했습니다만, 조각보만 하더라도 너무나도 다양한 정체성과 지향성을 가진 이들이 저마다 제각기 다양한 고민과 가치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걸요? 우리의 활동 방향과 가치를 규정짓고 왜곡하려는 이들이 있을 때, 어떻게 대응해가야 할지도 너무나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가 바라보는 가치는
트랜스젠더로서의 지속가능한 삶을 주요 가치로 삼습니다.
젠더와 다양성에 대한 고민을 담은 페미니즘적 활동을 하려 합니다.
트랜스젠더 인권을 향상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펼칠 플랫폼이 되고자 합니다.”
제가 몸담고 활동하는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에서는 조각보에서는 올해 초, 수 년간 쌓아온 내부 논의를 바탕으로 단체의 활동가치 항목에 '페미니즘적 활동을 한다'는 말을 추가했습니다. 단순히 단체에서 활동하는 구성원 개개인 모두가 페미니스트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한 현재의 남성-이성애-정상성 중심의 사회는 많은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삶 또한 옥죄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들이 지속가능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 즉 트랜스젠더의 인권 향상에 있어서도 페미니즘과 페미니즘적 관점을 담은 활동은 필수적이라는 데에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였기 때문입니다.
강연은 ‘젠더는 없다’, ‘트랜스젠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제로 진행되었고, 더 나아가 차별금지법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젠더를 법에 새겨서는 안 된다’와 ‘젠더는 페미니스트에게 해롭다’로 끝났습니다. 외국은 성별 정체성(즉 젠더) 항목이 포함되어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혹은 평등법)이 제정되어 있어 트랜스여성이 범죄를 저질러도 제대로 처벌하거나 대응할 수 없지만 현재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 있지 않은 한국의 상황은 페미니스트들이 무언가 해볼 수 있는 희망찬 상황이라고 호도하는 모습을 보며 여러모로 씁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러한 이야기가 명백히 사실이 아님은 둘째치더라도, 강연 내내 젠더에 대해, 젠더가 어떻게 해로운지에 대해 이야기했음에도 저는 강연이 말하고자 하는 ‘젠더’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트랜스젠더의 존재 자체가 여성 인권에 해가 된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성별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쉴라와 자매들이 모여 ‘다른 자매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그 자리에는, 적어도 둘 이상의 트랜스젠더이자 페미니스트인 개인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여성 신체 트랜스젠더’에 해당되는 FTM 트랜스남성인 저를 두고 존재 자체만으로 여성주의의 배신자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트랜스젠더인 저에게 있어 제가 삶을 지속하는 데에 가장 해로운 것은 젠더도 무엇도 아닌 가부장제라는 것입니다. 제 삶에는 소위 말하는 ‘여성 신체’로 인식되는 몸을 가지고 살아왔기에 요구받았던 규범과 낙인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부장제-이성애-정상성 중심의 규범은 트랜스젠더인 제 몸에도 낙인을 찍습니다.
제가 제 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단어는 트랜스젠더였고, 그래서 저는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기를 선택했습니다. 쉴라는 ‘여성 신체 트랜스젠더(트랜스남성)는 여성 신체로 살아가며 생겨난 방어 기제와 탈출 통로로서 트랜스젠더가 되기를 선택하였다’고 설명하지만, 트랜스젠더인 제 몸 또한 여전히 이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정상성 규범에 맞춰나갈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때때로 제 몸은 트랜스젠더이기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몸이 됩니다. 때로는 (트랜스) 남성이기에 어떠한 정상성의 틀과 규범에 맞추기를 요구받으며,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생물학적) 여성이기에 폭력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잠깐의 안녕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순응하거나 타협하더라도, 트랜스젠더 당사자 개인으로서, 또 트랜스젠더 인권 운동을 펼치는 단체에서 활동하는 입장에서 저 자신이 가장 먼저 원하고 이루고자 하는 것은 성별 고정관념과 성별에 기반한 차별을 비롯해 가부장제가 만든 정상성 규범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 삶에 있어, 그리고 트랜스젠더 인권 운동에 있어 페미니즘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페미니즘은 필수적입니다. 이것은 저뿐만 아니라 쉴라 제프리스와 쉴라의 자매들을 포함해 강연장에 모였던 모든 이들이 함께 바라보고 공감하는 가치일 것이라 믿습니다.
쉴라의 강연에서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이야기되던 트랜스혐오 - 자연적으로 주어진 성별은 절대 바꿀 수 없다, 트랜스젠더는 여성의 공간을 침범하려는 잠재적인 가해자다 등등 - 의 논리는, 사실 전혀 새로운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가부장제 속의 정상성 규범이 우리 사회에서 지속시켜온 트랜스혐오를 그대로 답습하며 재생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트랜스혐오는 결코 페미니즘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트랜스젠더 혐오를 타파하기 위해서, 트랜스젠더 인권 운동에서도 페미니즘은 필수적인 가치입니다.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Transgender Day of Remembrance : TDOR)입니다.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은 1998년 11월 미국에서 한 트랜스여성이 증오범죄에 의해 희생당한 것을 계기로, 증오범죄에 희생당한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을 기억하고 함께 애도하는 날로 시작되었습니다. 조각보는 독립된 단체로서 출범하기 이전, 트랜스젠더 인권운동을 하는 단체를 만들자는 프로젝트 2년차 시기였던 2014년도부터 매년 ‘먼저 떠나간 사람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이들의 삶을 기리되, 이것이 단순한 추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살아남은 우리들, 앞으로를 살아갈 우리들이 서로의 삶을 기억하고 지지하며 응원하고 연대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자’를 모토로 삼으며 추모의 날을 준비해왔습니다.
이번 강연은 트랜스젠더이자 페미니스트인 개인으로서 나와 내 주변의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어떻게 지속가능한 삶을 이어갈 수 있을지,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새로이 생각해볼 계기를 만들어주는 귀중한 자리였습니다. (이러한 자리를 준비해주신 주최 측에도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저는 제 자리에서 어떠한 관점과 활동으로 우리네 여성과 소수자의 삶을 좀먹는 가부장제 규범을 타파해나갈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활동으로 만들어나가려 합니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아닌, 가부장제 타파를 실천하는 페미니즘이 이어진다면, 그러한 활동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언젠가 만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_조각보 활동가 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