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0일은 이 세상을 먼저 떠난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을 기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트랜스젠더의 지속가능한 삶에 대하여 생각하는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Transgender Day of Remembrance : TDOR) 이었습니다.
조각보는 <기억, 모습, 살아갈 우리>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홍대입구역 인근의 다목적홀에서 2016년부터 이어져왔던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촛불문화제를 준비했습니다.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발언을 준비하며 느꼈던 각자의 생각과 감정을 후기로 담아 보았습니다.
며칠 전 만 4살이 된 조각보는, 올해도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을 촛불문화제로 기념하며 11월을 보냈습니다.
기획을 함께했던 한 사람으로서 짤막하게 총평을 하자면, 이번 촛불문화제의 신의 한 수는 '실내에서 열렸다'였습니다. 급 추워진 날씨에 올해도 거리에서 했더라면 추모할 마음을 얼려버리는 차가운 밤바람과 또 싸워야했겠죠.
<기억, 모습, 살아갈 우리>
올해의 TDOR 촛불문화제의 제목입니다.
올해는 여섯 명의 기억이 이야기가 되어 모였습니다. 기억의 이야기 하나하나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기억을 장식해준 또 다른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세 팀의 멋진 공연이 함께 했습니다.
소실점의 노래는 언제나 조각보 구성원 모두에게 친숙한 노래였고,
무지개음악대의 선율은 마음을 감싸고 지나갔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던 곡을 연주해주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차연지님은 추모의 날이 갖는 의미에 딱 맞는 신곡을 선보여주셨습니다.
객석 옆의 한 자리에서 뉴욕 트랜스 마치 사진전을 열어준 라온,
추모의 날의 의미에 더욱 다양함을 더해준 피우다 등도 감사합니다.
저는 "누군가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이러한 물음을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 오면 늘 묵직하게 안고 살아갑니다.
추모는, 그리고 기억은 단지 행동이 아니라 삶이라고 생각 듭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기억하는 자체가 나의 중요한 모습이겠고요. 그렇기에 이번의 여섯 가지 기억 덩이들에 귀기울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기억 덩어리에
누군가는 귀기울였고,
누군가는 눈감고,
누군가는 불편했고,
누군가는 무관심했고,
누군가는 공감했고,
누군가는 공명했고,
누군가는 ....
여섯 개의 기억 덩이들은 어떤 게 옳고 어떤 게 그른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저 그 기억은 존재할 뿐이었죠.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는 자도, 말하는 자도, 그리고 외면하거나 잊는 자도 모두 다 그 모습대로 살아가는 우리일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그 날 나는 또 한 번 더 그렇게 기억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누군가는 귀기울이지 않고 비웃었을지도 모를 그 이야기들을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의 활동가'라는 나의 정체성, 나의 모습 한켠에 붙이고서요.
ps. 장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여 당황하던 저에게 매우 큰 도움을 주신 썸머님 감사합니다.
_ 조각보 활동가 준우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TDOR 촛불문화제에서의 발언을 준비하며, 트랜스젠더이자 성폭력피해생존자로서 내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 고민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것은 저 구호였습니다. 저는 저 문장을 볼 때마다 '그러면 내가 돌아갈 일상은 어디쯤에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저도 자주 인용해왔던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트랜스젠더'에게, '성폭력피해생존자'에게 지속가능한 일상은 어떤 것이고 회복은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인지는 고민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네요.
트랜스젠더/성폭력피해생존자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저 또한 삶을 지탱하는 것 자체가 힘에 겨울 때가 많았습니다. 당장의 생계 고민 앞에서 내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뒤로 미뤄놓거나 포기하는 선택지만을 골라야 했고, 때로는 과거의 피해 경험과 기억들이 저를 계속해서 옭아매기도 했습니다. 피해로 인해 망가진 일상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되돌려야 할 지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제가 겪었던 피해 사실과 나의 정체성이 나의 '지속가능한 삶'을 가로막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만들어 갈 일상이 있다면 그건 지금부터겠구나.
이전의 어떠한 상태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새로 나의 일상을 만들어가면 되는 거였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제가 가진 정체성, 때로는 나에게 부담만 안겨 주는 것 같았던 정체성을 통해 제가 '만들어왔던' 일상도 다시 보였습니다.
만약 누군가 저더러 특정 피해 사건 이전으로 제 삶을 되돌려주겠다 제안한다면 아마 거절할 것 같습니다. 첫째는 삶의 어떤 부분이던 제 주변에는 폭력이 있었거나 그 폭력을 폭력이라 말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던 제가 있었기에, 그 지겹고 아팠던 과정을 다시 겪고 싶지 않기도 하고, 둘째는 그 지닌한 과정을 겪고 나서야 지금의 제가 있게 된 거라 생각해서 입니다. 저는 제 트랜스젠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트랜지션 여부나 내가 입는 옷과 상관없이 내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요.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계기로 반성폭력/여성주의 담론을 접했고, 그 담론에서 배운 언어들은 제 일상을 지탱할 힘이 되었습니다.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성폭력피해생존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여러 모로 닮은 결이 많습니다. 우리는 정체성/피해 사실에 대해 늘 의심받고, 진정성을 증명하라고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나의 정체성에 대해, 피해 사실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에게 있어 '일상으로 돌아가기'의 시작이었던, (정체성/피해 사실에 대해)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또 '말해도 괜찮다' 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는 무관심했고, 누군가는 왜 굳이 추모의 날에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야 했냐고 불편해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이야기를 '굳이' 했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이것이 내 지속가능한 삶을 이어가는 것의 시작이자 일부였기에, 이 이야기들은 꼭 꺼내놓아야 했었다고요.
매년 11월 20일이 되면 트랜스젠더의 인권 현황을 알리고 당사자들이 더 나은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움직임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이러한 움직임은 해마다 점점 더 커져가고 있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불과 6년 전만 하더라도 트랜스젠더 인권단체가 단 한 곳도 없던 우리나라였지만, 지금은 여러 단체와 개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을 기리고, 당사자들이 오롯이 정체성을 존중받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트랜스젠더 인권 현황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해마다 점점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기를, 그리고 그렇게 삶을 이어나가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_ 조각보 활동가 리나
제가 조각보에서 활동한 4년간 11월은 항상 가장 바쁘고 정신없는 시기었습니다.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TDOR)인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인권활동에서 퀴어퍼레이드 만큼 중요한 날입니다. 모든 성소수자 정체성을 기념하고 가시화하는 퀴어퍼레이드와는 달리, 11월 트랜스젠더의 추모의 날은 폭력과 차별로 먼저 떠난 트랜스젠더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조각보에서 준비하는 과정도 조금 더 조심스럽고, 고민이 되는 부분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추모란 무엇일까?’
매년 11월 TDOR을 기획하는 첫 회의마다 저희는 이 질문부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트랜스젠더의 삶을 추모하고, 트랜스젠더를 향한 폭력과 차별에 저항하는 날로 미국에서 시작된 TDOR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풀어나갈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되돌아보면 2016년부터 조각보에서 기획한 TDOR 행사들은 슬프고 억울하거나 또는 집회와 같은 행사보다도 먼저 떠난 트랜스젠더들을 긍정적으로 기억하는 행사들이었습니다.
덧붙여 이 행사에서야말로 돌아가신 분들만이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열심히 살아가는 트랜스젠더들을 기억하는 시간이 되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TDOR 행사를 기획할 때에는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긍정적인 행사들을 만들고, 발언이나 공연을 섭외할 때에도 전통적인 추모에서 멈추지 않는 컨셉들을 생각하며 진행해 온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2019년 올해의 TDOR을 위한 행사 기획과정은 특히 힘들었습니다. 조각보 내에서 인력도 부족했고, 예산도 충분하지 못해서 행사를 무사히 진행하고 풀어나갈 수 있을지 많은 걱정이 들었습니다. 행사 날짜를 주중으로 잡은 것도 마음에 걸렸고, 올해 행사 컨셉에 대해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회의를 차차 진행해나가며 올해만의 슬로건이 만들어졌습니다. 올해 행사의 첫 이름은 <여러가지 정체성을 남기는 우리들> 이었습니다. 행사 이름치고는 조금 어색해서 나중에는 <기억, 모습, 살아갈 우리>로 바뀌긴 했지만요.
하지만 취지는 같습니다. 트랜스젠더 당사자를 추모할 때에, 매번 당사자의 트랜스젠더 정체성만이 주로 남게 되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정체성을 나타내고 그 이야기를 풀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발언을 섭외할 때에도 지지 발언보다는 트랜스젠더분들과 앨라이분들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렇게 트랜스젠더와 앨라이를 넘어서, 한 사람의 페미니스트, 의료인, 활동가, 이주민 또는 성폭력 생존자로서의 이야기를 모아보았습니다. 지난해에 비하면 조금 더 길고, 깊게 파고들어 갈 수 있는 발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올해의 행사 장소는 실내여서 공연도 조금 더 빛날 수 있었습니다. 공연자 분들도 올해의 취지에 맞춰 너무나도 멋진 곡들을 준비해주셨습니다.
힘들었기도 하지만, 너무나도 보람되고 멋진 행사가 되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_ 조각보 활동가 다니
2019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촛불문화제 <기억, 모습, 살아갈 우리>에
함께 자리해주시고 지지를 보내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조각보 활동가 일동 올림 -
지난 11월 20일은 이 세상을 먼저 떠난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을 기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트랜스젠더의 지속가능한 삶에 대하여 생각하는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Transgender Day of Remembrance : TDOR) 이었습니다.